"괜찮아, 너는 괜찮아질 거야" 3

나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by 지안의 문장

사락사락, 교실 창밖으로 들리는 작은 목소리들과 작은 소음사이로 책이 한 장씩 넘어가는 소리가 울린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행성을 떠나는 순간부터 아이는 숨죽이고 여정에 함께 오른다. ‘어린 왕자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행성에서 떠날 수 있었던 걸까? 나라면 두려워서 못 떠날 거 같은데......’ 말을 전하는 것조차 부담을 느끼는 아이에게는 단단한 벽 같은 질문이었다. 그 순간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셨고, 아이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 “좋은 책을 골랐구나. 집에 가져가서 읽고 느낀 것들을 일기장에 적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쑥스러움에 짧은 대답과 인사만 남기고, 책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어느 날 보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이야기를 빨리 읽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나 보다.


그저 읽고 싶은 책을 집에 가져와서 볼 수 있게 됐을 뿐인데도 할머니의 핀잔이나, 할아버지의 심부름, 눈치 보았던 것들이 조금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남동생과 함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기 전 숙제를 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책장을 하나씩 넘겼다. 넘기면서 아이에게 남은 질문이 아직 머릿속을 떠돌았다. ‘어린 왕자의 행성에는 장미꽃도 함께 있는데 왜 떠났을까?’ 아이는 자신을 떠올렸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할머니 집에서 있어도, 학교에서 그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여도 늘 외로웠다. 그렇다면 ‘마음을 나눌 수 없어서 그런 걸까?’하는 생각이 마음에 콕 들어왔다. ‘내가 마음을 나누지 않고, 나만의 행성에서 나를 가두고 있는 걸까?’ 아이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넘기던 책장을 멈추다 다시금 넘긴다. 어린 왕자가 지나온 행성들을 거쳐 지구에서 만난 여우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아이의 눈길은 천천히 깊게 들여다봤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라는 여우의 말에 어린 왕자가 마음에 큰 깨달음이 느껴졌던 것처럼 아이도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행성이 불꽃처럼 터지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나는 아무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던 거야.’ 아이는 같은 장면을 일고, 또 읽었다. 어떤 의미인지 온 마음으로 읽고 싶었다. ‘나만의 친구, 내가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나려면 혼자만의 행성에서 떠나야 해.’ 너무도 떨리는 일이지만 먼저 다가가서 마음을 나누고, 말을 나누고, 웃음을, 비밀을 나누며 서로에게 길들여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정말 해볼 수 있을까? 누가 먼저 다가와주면 해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아이는 다음날 친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길 간절히 바라며 책장을 덮고, 일기를 쓰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 안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어쩐지 교실의 공기도, 풍경도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입안에서 하려던 말들을 곱씹으며 머릿속으로 몇 번씩 연습했다. 숨을 한 모금 머금은 후, 눈앞에 보이는 선생님께 다가가 일기장을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 어제 책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다른 책도 읽고 싶은 게 있다면 빌려가서 읽어도 돼.”

“네, 어제 빌려간 책을 조금만 더 집에서 읽고 와도 될까요?”

“그럼, 어린 왕자 책이 정말 좋았구나."

"네, 좋았어요."

"지안아, 너는 지금 잘하고 있어.”

“네... 고맙습니다.”


교실 안 아이의 자리로 돌아가는 짧은 발걸음 내내 심장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길고 다정한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적이 없어. 어떤 말로 이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로 간절한 마음은 통하는지도 모른다. 반에서 인기가 많고, 웃긴 얘기도 잘하는 여자아이가 말을 건다.


“지안아,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다음에는 나랑 짝할래?”


맙소사, 친해지고 싶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목구멍에 걸린 돌덩이를 천천히 밀어내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쑥스러운 말투로 작게 전했다.


“좋아, 나하고 친해지고 싶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 친구는 자신과 짝을 하게 되면 정말 재미있게 놀자고 들떠서 말했다. 말하는 친구보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귄다는 생각에 아이가 더 들떠있었다. 붉어진 얼굴이 더더욱 진하게 붉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내게 다가온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첫마디를 나눈 이후, 우리는 마음을 나누며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소중한 친구사이가 되었으니까. 우린 꽤 잘 맞았고, 서로를 웃기다고 했다. 아직까지 기억하는 건 그 친구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자신감 있는 호탕한 말투다. 정말로 그리운 모습이다.


아이는 할머니 집, 작은 방에서 어린 왕자를 끝까지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 어둠뿐이던 이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왕자처럼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가 만나고 싶었던 다정한 행성은 멀리 있었을 뿐, 이제는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고요한 마음의 땅 아래 말을 거는 새싹 하나가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아이는 6학년 때는 타의였지만 부반장을 하게 되어 포기하지 않고 잘 마무리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응원의 연락을 받기도 했다. 엄한 분이셨지만 늘 곁에서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많이 해주셨다. 좋은 어른이셨다. 중. 고등학교 시절은 조금 더 힘든 시기가 있어서 다시 ‘고요한 아이’가 되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땐 나도 조금 자라났고, 의견을 말할 수 있었으며 사랑하는 책과 음악이 있어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이른 아침에 등교를 하며 음악과 사색에 젖어드는 순간은 나와의 대화가 시작되는 거 같아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단단해지며 작은 용기들을 쌓아 올린 지금의 내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고요한 아이’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홉 살의 내가 마음으로 다가와 웅크리고 앉아있는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은 출산을 한 후에 더 짙어졌다. ‘나처럼 상처가 고여 있는 사람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에 상담을 받기로 했고, “그때로 돌아가서 어린 자신을 만나다면 가장 먼저 뭐라고 말해주고 싶나요?”라는 상담사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렀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그러지 말라고 충고해야 하나?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참고 이겨내라고 해야 하나?' 수많은 복잡한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 어떤 것도 아홉 살 아이에게 해줄 말은 아니었다. 엉켜버린 실타래와 같은 고민의 끝에서, 마침내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괜찮아. 너는 괜찮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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