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고 싶던 나를 다시 마주한 순간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빗물이 그치지 않고, 바짓단 끝을 적시던 한여름. 친구의 남자친구가 학교에서 작은 마임 공연을 한다기에 장대비를 뚫고 초대받아 갔다. 같은 학생이지만 강의실이 아닌 어두컴컴한 소극장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낯설고도 신비로웠다. 마치 어릴 적 이불속에 숨어 해리포터의 첫 장을 넘기며 앞으로 펼쳐질 마법을 기대하던 그 기분이었다.
등받이도 없는 딱딱한 의자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빗물에 젖은 눅눅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핀 조명 하나가 켜졌다. 무대 위는 고요함 속에서 말보다 강렬한 몸짓의 언어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인생’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마임 배우의 손끝 하나, 눈빛 하나가 대사가 있는 연극보다 깊이 가슴을 울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니, 내 심장 박동 소리가 손끝까지 떨림으로 전해졌다.
공연이 끝난 후, 박수 소리와 함께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이 무대 위에 머물렀다. 친구와 함께 소극장을 나서며 우산을 펼치려던 찰나, 빗물이 고인 땅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빗물을 반짝이게 만드는 맨발이 내 두 눈을 가득 채웠다. 공연장 옆 연습실에서 나온 듯, 그들의 발끝만 봐도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다랗게 늘어진 흰 천 자락이 바람을 타듯 나풀거리는 가벼운 몸짓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마치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흥에 겨운 목소리를 내며 자유롭게 춤추는 모습은, 마임과는 또 다른 종류의 심장 박동을 느끼게 했다.
빗소리처럼 마음에서 쏟아져 내린 말, “저건 뭐야…?” 입 밖으로 튀어나온 궁금함에 친구의 남자친구가 웃으며 답했다. “탈춤 추는 애들이야. 여름에 저렇게 모여서 춤 연습하거든.” 그들의 맨발이 빗물과 어우러져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별빛이 땅에 내려앉아 튕겨 나오는 듯했다. ‘나도 저렇게 빛나고 싶다.’ 소리 없이 삼킨 이 마음의 외침은, 내가 첫눈에 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그 빛을 따라 낯선 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선택은, 길고 지난한 고군분투의 시작이었다.
사계절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 기억도, 생김새도 조금씩 늙어갈 무렵, 기약 없이 찾아온 선물이 내 품에 안겼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만들어낸 결정체인 듯, 세찬 울음을 터뜨리며 빛나는 '아이'였다. 그 순간, 나의 모든 시간이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사랑과 삶의 물결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어느새 작은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동그란 등이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이가 손에서 놓지 않는 책은 '한판 놀아보자 탈춤'. 그 여름날, 빗속의 탈춤꾼들에게 반했던 기억을 되살려 쓰던 탈춤 이야기 극본 작업 중 우연히 발견한 그림책이다. “한번 더!”라며 짧은 손가락으로 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는 아이 덕에, 한 달에 백 번은 넘게 읽어준 것 같다.
아이는 첫눈에 반했다. 춤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본다. 그 모습에 내가 겹쳐 보였다. 그 여름날, 마임 공연의 고요한 몸짓에 매료되고, 이내 골목에서 빗물과 어우러진 탈춤꾼들의 맨발을 보며 심장이 뛰었던 그 순간부터, 나 역시 탈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되새기며 춤을 추고, 무대에 올랐다.
우연히 시작된 순간은 운명처럼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편입 후 가입한 탈춤 동아리에서 나는 비에 젖은 맨발처럼 자유롭게 춤추고 싶었다. 하지만 낯선 교실에서 말 한마디 건네기 어려워하던 그 '고요한 아이'가, 수십 명의 의견을 조율하는 리더가 되었으니 그 간극은 당연히 버거웠다. 빛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마음 한편에 ‘첫눈에 반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스치기도 했지만, 졸업 후 시간이 쌓이며 빛과 어둠이 함께했던 그 시절은 닫힌 문안으로 묵혀졌다.
그런데 아이의 동그란 눈이 반짝인다. 남편의 본가에서 찾아낸 한삼 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휘날리며 춤추는 모습은, 그 여름날 내가 반했던 바로 그 장면을 되살려낸다.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고, 묵혀두었던 이야기가 다시 숨을 쉰다. 아이는 잠들기 전이면 "엄마, 탈춤 얘기 해주세요."라고 조른다. 나는 아이를 보며 미소 짓는다.
“엄마와 아빠가 대학교에서 탈춤을 추며 청춘을 보내고, 서로를 알아가다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 그러다 너라는 선물이 찾아와 행복이 더 커졌단다.”
첫눈에 반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의 춤과 반짝이는 눈빛을 통해, 나는 다시 그 순간의 나에게로 돌아간다. 그 여름날, 나는 빗물 속에서 빛나고 싶었다.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내 아이의 반짝이는 눈 속에서, 우리의 춤추던 청춘과 사랑이 가장 밝게 빛나고 있음을. 그 빛이야말로 내가 진짜 찾던 것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