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내고 말겠다는 의지와 움직임
아직 쌀쌀한 봄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단에 앉아 중앙 무대를 바라보는 빛나는 눈동자들이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낸다. 형형색색의 조명은 무대 위에서 공연을 선보이는 동아리 선배들의 몸짓을 비춘다. 수많은 시선 중 단 하나라도 자신의 동아리에 스며들길 바라며 선배들은 땀방울을 흘린다. 나의 작고 동그란 두 눈도 그중 하나였다. 운명이란, 이럴 때 쓰는 단어일까? 조금 쑥스럽지만 스물세 살의 나에게 '운명'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덩덩덩덩-!
장구와 북,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빛깔이 쨍한 한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기다란 천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사자탈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그 털을 휘날렸다. 나는 모든 것을 두 손 꼭 쥐고 숨죽여 지켜봤다. 분명 악기 소리, 사람들의 환호성, 공연자들의 대사까지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찼는데도, 세상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은 그 기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거였어. 해보자.’
마음속 울림은 지극히 단순했고, 나는 그 단순함에 이끌려 탈춤 동아리에서 사계절의 땀방울을 흘렸다. 그렇게 조금씩 빛나는 시간에 다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함께해야 한 쌍의 단어가 되듯, 딸깍, 하고 빛이 꺼지는 듯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이끌리듯 달렸던 1학년의 끝자락, 동아리 임원이 된 그날부터 무언가 꼬이기 시작했다. 리더십에는 영 재능이 없었고,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내가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며 생긴 마찰들은 나를 '오기'로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어느 겨울날, 동아리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학번 높은 선배들은 후배들과의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낭만적인 밤을 꿈꿨다. 눈이 내려 시린 바람에 바닥은 이미 꽁꽁 얼어 있었다.
“시원하게 맨발로 탈춤 한 번 추자!”
선배들의 말에 내 마음은 사색이 되었다. ‘이 한겨울에 맨발로 춤을 추자고? 이게 정말 낭만이라고? 발가락에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가뜩이나 수족냉증이라 신발을 신고 있어도 발이 얼음장 같은데… 말도 안 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가는 동안, P 선배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부회장 누구야? 쟤? 무슨 과라고? 극작과? 그런데 쟤는 왜 저래? 동아리 부회장답지도 않고, 극작과답지도 않네.”
한겨울에 추위 말고도 얼굴을 데울 일이 있다니. 그 선배의 말이 나의 ‘오기’ 버튼을 또 한 번 눌렀고, 시뻘건 얼굴로 맨발의 빙판 위 탈춤은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나의 고유한 빛깔은 잠시 도화지 뒷면에 숨겨둔 채, ‘오기’로 덧칠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동아리 선배들과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바쁜 회장을 대신해 동분서주하며 낯가림 심한 나를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해내려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점점 많아졌고, 그 안에서 꼬여가는 상황과 인간관계는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것처럼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점점 나 자신의 빛깔은 희미해지고,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저 해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기에, 그것이 ‘오기’라는 썩 내키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지라도 끝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원래 인생은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그렇게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 갈 무렵, 힘든 일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집안 사정으로 2년간 휴학해야 했다. 당장 등록금도 없었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휴학 직전인 2학년 1학기 때 썼던 뮤지컬 대본을 수정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미 휴학생이었지만, 1학기 내내 매달렸던 첫 작품이 눈에 밟혔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나는 다시 그 글을 붙잡았다.
낮에는 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글을 써서 작품을 완성했다. 어떤 날은 작곡가와 함께 밤새 학교 작업실에서 곡을 만들기도 했다. 시작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 앞섰던 것 같다. 마침내 대본은 완성되었고, 공연도 잘 마무리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공연 이후였다.
“그게 왜 네 작품이야! 내가 만든 거지! 그걸 어째서 네가 썼다고 해!”
마음을 담아 쓴 가사, 어떻게든 이해하려 애썼던 인물들,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찾아 헤매던 무수한 밤들. 이 모든 것이 담긴 글을 담당 교수님은 그저 자신이 한 것이라 우기며, 내 이름도 없이 공연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 순간, 선배의 비아냥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불꽃이 터졌다. 이것은 단순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오기'가 아니었다. 나의 무수한 밤들과, 내가 사랑한 인물들과, 나의 첫 작품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 그것은 '열정'이었다.
‘오기’는 결국 나를 움직이게 만든 엔진이었다. 나는 이 동력을 단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다. 내 모든 시간 속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그저 ‘오기’로만 남았던 걸까? 나는 이 엔진을 달고 ‘오기’에서 ‘열정’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건넜다. 나는 교수님의 그 말에 맞서, 나의 모든 것을 태워 그 작품이 내 것임을 증명하기로 했다. 선배들에게 수소문해서 해결 방법을 묻고, 저작권도 등록하며,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내가 작가임을 확실히 못 박아두었다. 사실 대단하거나 잘 된 작품은 아니었지만, 무수한 밤의 열정이 담긴 나의 첫 작품이었기에 그저 해내야만 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어때야 하는 걸까? 영감이 번뜩이고, 자유분방하며, 뭐든지 적극적이고 열정 넘치며, 차별화된 무언가가 있어야만 하는 걸까?
평범함, 고요함, 그냥 그저 그런 것. 나는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나의 빛깔을 감추고 ‘오기’로 쌓아 올린 모습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건너고 나니, 그 안에는 또 다른 빛깔을 지닌 ‘열정’을 품기 위해 달려온 내가 있었다.
그저 그런 사람이라도 ‘오기’와 ‘열정’ 사이를 건너면, 예술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