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은 하고 싶습니다.

내 서랍 속 쌓아둔 실패의 목록

by 지안의 문장


“너도 이제 슬슬 안정적인 길을 찾아봐야지.

계속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는 나이잖아.”


걱정을 하는 친구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마음에 박히던 날, 나는 정말 내게 글 쓰는 재능이 없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연이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던 때였다. 또 다른 공모전의 1차 합격 소식에 잠시 부풀었던 마음은 ‘면접 탈락’이라는 네 글자에 주저앉았고,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1순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공연 기회를 놓쳤던 연극 공모전의 기억이 뒤따라왔다.


그럴 때면 나는 실패했다는 창피함에 모두에게서 도망치던 날을 떠올린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 제대로 준비된 소품들과 열연을 펼치며 땀으로 축축한 배우들의 모습과는 반대로 부끄러운 대사들이 울렸다 사라진다. 그 공연이 끝나고, 나는 뒤풀이에 꼭 가라는 멘토의 말을 뒤로한 채 숨을 곳을 찾아 헤맸다. 함께 고생한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실패의 감정은 나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관계에 서툴렀던 나에게 협업 과정은 가면을 쓰는 일이었고, 내 이야기에 대한 확신 없는 태도는 결국 작품을 아름답게 만들지 못했다. 그날의 후회는 지금도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기억은 또 다른 실패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더 서툴고, 더 부끄러웠던 첫 실패의 순간으로.


휴학하며 모은 돈을 쏟아부어 만들었던 나의 첫 영화.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마저 끊긴 극장 안, 스크린의 희미한 불빛만이 텅 빈 객석을 비추던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밤, 수치심에 잠 못 이루다 문득 깨달았다. 스크린 속 어색한 대사 한마디, 엉망인 장면 하나까지도 전부 도망치지 않고 세상에 내놓은 나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첫 용기였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실패의 기억 속에는 나를 지탱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기억들은 내가 막막한 순간에 숨을 한 번 고르며 다시 불러내는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실패는 나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 무언가를 쥐여 주기도 했다. 첫 뮤지컬을 끝내고 받았던 얼마 안 되는 원고료, ‘다음에 대한 희망’, 그리고 공모전에 덜컥 합격하며 느꼈던 ‘내 노력이 물거품은 아니었구나.’ 하는 작은 위안까지. 이 모든 것은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도 아니었다.


결국 내 서랍에 쌓인 것은 그저 ‘실패의 목록’만은 아니었다. 실패의 문장, 후회의 조각, 그리고 그 안에서 건져 올린 아주 작은 용기와 희망의 파편들이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실패했다고 해서,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예술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이 모든 과정은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당장의 나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수많은 실패와 후회, 그 속에서도 무언가를 계속 쓰려하고 만들려 했던 나의 시간들 안에는, 결국 예술가가 되고 싶은 한 사람의 간절한 예술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실패와 용기의 기록을 다시 서랍 속에 넣는다. 언젠가 이 서랍을 열었을 때, 나만의 예술 안에서 빛나는 조각이 되길 바란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은 하고 싶습니다.’ 내일, 다시 텅 빈 페이지를 마주하며.

keyword
이전 11화오기와 열정 사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