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이 튀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 2

우리는 서로의 첫 번째 독자였다.

by 지안의 문장


진한 풀 내음의 여름밤 향기가 코끝에 맴돌던 1년 반의 학교생활. 그 뜨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담담하지만 쓰라린 마음으로 휴학 신청서를 냈다. 과 행정실 조교님의 따스한 인사를 뒤로한 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며, 그와 나는 한동안 서로의 어떤 것도 모르는 시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2년의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동고동락했던 동기들은 졸업했고, 캠퍼스는 낯선 얼굴들로 채워졌다. 복학생 반열에 오른 나 또한 많이 변해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 했던 학원 강사 일은, 살아남기 위한 약간의 능글맞음을 장착시켜 주었다. 낯가림이 심하고 까칠해 보였던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쓴 가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가면이 때로는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얼굴이라도 아는 동기에게 먼저 말을 걸어 친해지려 애썼다.


오랜만에 돌아온 학교에서의 시간은 모든 것이 소중했다. 강의실도, 책상도 그대로인데, 그리웠던 수업을 듣고 마음에 스며드는 문장들을 공책에 옮겨 적는 일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런 감정에 젖어 있던 순간, 옆자리에 끼익- 하고 의자를 당겨 앉는 사람이 있었다. 텅 빈자리도 많은데 굳이 옆에 앉는 사람이 누굴까.


“누나, 잘 지냈어요?”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있었다.


“어?! 선배, 복학했구나. 근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아, 교양과목 근로장학생이라 거의 사무실에만 있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네요.”

“나도요. 선배도 복학해서 아는 사람 별로 없겠다.”

“그렇죠. 누나, 혹시 요즘도 동아리 후배들이랑 연습 같이해요?”

“아니요. 선배는 해요?”

“저녁 연습 같이하고 있어요. 누나도 시간 되면 놀러 와요.”


정말 오랜만인데도, 처음부터 어색함이 없었다.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만난 사람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오래 만난 여자 친구가 있었고, 나는 여전히 고독한 짝사랑 중이었으니까. 우리는 그저 서로의 글에 대해 가끔 이야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딱 좋은 선후배 사이였다.


그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과 수업에서 우연히 쓴 단편 시나리오를 좋게 본 교수님께서, 타과생임에도 불구하고 ‘피칭(Pitching)’ 무대에 서보라고 제안하신 것이다. 내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평가받는 일.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차다는 생각에, 나는 무작정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배, PPT 잘 만들어요?”

“조금?”

“그럼 나 좀 도와줘요.”


아직 내 시나리오에 확신도 없고, 영화 제작 경험도 전무했던 막막한 시간. 그는 묵묵히 내 옆에서 선배로서, 그리고 나의 첫 번째 독자로서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밤늦게까지 함께 자료를 찾고, 발표 대본을 다듬어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인데도,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누나처럼 이런 글 못 써요. 누나 글을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싶고, 정말 열심히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니까 끝까지 해봐요. 어려운 거 있으면 또 도와줄게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1학년 첫 O.T 조에서 만났던 K선배의 냉소와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처음으로 받은 순수한 인정, 나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첫 독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선배와 후배를 넘어,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는 창작의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칭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모두가 떠난 동아리 방에 홀로 남아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으로 가득 차 더 이상 수정을 할 수 없겠다는 한숨이 밀려왔다. ‘집에 가서 하자.’ 당장이라도 모든 걸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발끝에 매달렸는지, 걸음이 질질 끌리는 듯했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 숨을 돌리려 걷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누나!”

“선배, 연습 이제 끝났어요?”

“네, 끝났어요. 가는 길에 누나 내려오는 거 보이길래.”

“아, 그럼 같이 가요.”


잠시 말없이 걷는 틈에, 그는 조금 이상한 말을 했다.

“누나, 힘들죠? 잠깐 눈 감아 봐요.”


그의 말에 홀린 듯 눈을 감자, 커다란 손이 눈 위를 가려왔다. 세상이 더 어둡고 고요해졌다.

“이제 떠요. 하늘 봐 봐요.”


감았던 눈을 뜨자, 짙고 검은 밤하늘 가득 작은 별빛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죠? 누나, 힘내라고.”

“……고마워요.”


그는 단순히 예쁜 것을 보여준 게 아니었다. 나의 불안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잠시 멈춰 하늘을 보게 해 준 첫 사람이었다. 쉼 없이 달려야만 뒤처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내게, 그는 처음으로 ‘잠깐 쉬어도 괜찮다’고 커다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 밤의 별빛 덕분에, 나는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을 끝까지 간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가장 든든한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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