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

우리는 가끔 서로의 슬픔을 엿보았다.

by 지안의 문장


서로의 마음에 한편 자리를 내어준다고 해서, 그 자리가 처음부터 온전한 모양은 아닐 것이다. 의자로 치면 등받이만 있거나, 다리 한 짝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자리가 뭐라고 이따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서로에게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여전히 선배였던 그에게, 나는 의자의 다리 한 짝쯤은 되었을까.


“누나, 어떻게 지내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잠깐 만날 수 있어요?”


졸업 후 각자의 직장을 다니면서 연락은 자연스레 뜸해졌다. 현실과 미뤄둔 꿈 사이에서 표류하던 스물아홉. ‘이쯤이면 방황을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세 번째 아홉수는 나를 다시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때 걸려온 그의 전화는 반가우면서도, 반짝였지만 멀어진 청춘의 한때를 떠올리게 해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회사 끝나고 저녁에 만날까요? 제가 누나네 회사 근처로 갈게요.”


글 쓰는 일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싶어 어린이 그림책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을 잡고 회사 근처 지하철역 앞에서 만났다. 밤이 되면 더 붉어지는 네온사인 아래 서서, 그가 왜 나를 찾아오는지 생각했다.


‘일이 잘 안 풀리나? 여자 친구랑 힘들어하더니, 결국 헤어졌나?’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 키는 큰데 바싹 마른 얼굴을 한 그가 힘없는 나뭇가지처럼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자, 그도 애써 밝은 얼굴로 화답했다. 얼굴에 수심이 깊어지는 건 나 하나로 족한데, 어찌 그의 눈빛마저 수척해진 건지 마음이 아팠다.


“다른 남자를 만난 대요. 나한테 미안하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기는 싫다고. 그런데 힘들 때는 또 저한테 연락을 해요. 그러니까 자꾸 희망을 걸게 돼요. 내가 못 해줬던 거 이제 다 해줄 수 있는데, 언젠가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요.”


평소 말수가 적던 그는, 꾹꾹 눌러 담았던 슬픔을 봇물 터지듯 토해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피칭 전날 밤, 불안에 떨던 내 곁을 그가 말없이 지켜주었던 것처럼.


“다시 붙잡으면 안 되겠죠? 계속 기다리는 것도, 이젠 안 되겠죠?”


그의 물음은 허락을 구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실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조르는 어린아이의 울음 같았다.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다른 누구보다, 선배 마음이 가장 중요하죠.”


모든 질문의 답은 이미 자기 안에 있다. 그는 내게 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해진 답에 대한 공감을 바랐을 뿐이다. 나는 그저 그의 아픈 사랑이 무사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그가 다시 예전처럼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는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그의 슬픔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과거에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 주었던 노래를 그에게 들려주고, 노을이 구름을 예쁘게 물들이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그가 내게 별을 보여주며 '잠깐 쉬어도 괜찮다'라고 말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작은 위로의 별빛들을 보내주었다.


시간이 흘러, 그의 마음속에서 아팠던 사랑은 청춘의 한 조각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슬픔의 계절을 온전히 겪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재수할 때 이후로 처음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 쓴 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가 다시 자신만의 별빛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지만, 비슷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었다. 고된 현실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찾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글’이라는 애틋함이었기에, 우리는 각자의 길목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가장 깊은 슬픔과 공허함을 엿본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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