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어쩌면

노마드 비평 6. 『사라질 아이』, 이경순

by nomadic critic

「뮤즈」(앤터니 버제스, 『세계 SF 걸작선』, 도솔, 2002)에서

문학사학자인 주인공은

셰익스피어의 원고에 한 줄도 얼룩이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정말로 그 희곡들을 썼는지 확인”하려고,

2064년에서 1595년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시간여행자가 미래에서 가져온 희곡을 읽으며

“시인들이

뮤즈(시, 음악 등을 주관하는 여신. 흔히 문학적 영감을 가리키는 말로 비유적으로 쓰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게 아마 이런 방문객들을 이야기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잉크가 번진 자국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베니스의 상인』을 베껴 써내려갔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쌤앤파커스, 2019)면,

『사라질 아이』(이경순, 마루비, 2022)에서처럼

울산 대곡리의 반구대도

시공간이 중첩되는 지점일 수 있겠다.


준수는

‘체험학교 역사 탐방단’에서 반구대로 여행을 왔다가,

수천 년 전 한반도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거북이족 마을로 시공간 이동을 하였다.

그리고 학교 생태학습장에서 토끼 키우던 일을 떠올리며

토끼 우리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원시인 아이들이

토끼를 잡아먹지 않고 키우게 되면

먹을 거 떨어져도 걱정 없겠다는 생각으로 동의하면서,

준수는 바위에 새로운 그림을 덧그리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끝부분에 가서야

반구대 암각화에서 “우리 속에 있는 동물 그림”을 서술함으로써,

마치 준수로 말미암아 생긴 것처럼 읽히게 만든다.


준수가 토끼를 키우고부터 부족 어른들이 울타리를 만들고 사슴이랑 노루 같은 동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186쪽.


이경순 작가는

등단작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문학사상사, 1998)에서도 비슷하게 설정을 한 적이 있다.

사총사가 고구려로 시간여행을 갔을 때,

기억을 떠올려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오십만 당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토성(土城)을 쌓게 함으로써

십만 고구려 사람들의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이때 사총사는,

「뮤즈」에서 시간여행을 한 문학사학자와

『사라질 아이』에서 준수처럼

역사를 실현함으로써 과거를 완성하였다.


준수는

바위그림 근처에서 파란 하늘을 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는데,

수천 년을 거스른 시공간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더니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둘러보던 체험학교 현실로 되돌아왔다.


현실 시간은

거북이족 마을에서 지낸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흘렀지만,

작가는

준수가 신석기 시대에서 살았던 여러 날을

꿈이나 환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탐방단 보조 강사는

자유 시간이 끝난 뒤 준수를 보더니,

“그런데 너 왜 이렇게 시커멓냐? 야생에서 한 10년은 살다 온 애 같네.”라고 말하고,

준수도 자기 팔뚝을 보고 “양쪽 팔이랑 손등이 까맸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간여행 전에는 없었던

“아기를 등에 업은 귀신고래 조각상”(고래이빨 형이 만들어 준) 목걸이가

준수에게 남아 있었다.


이처럼 과거가 박제되지도 않았고 박제될 수도 없으며,

과거에서는 미래인 현재가 과거와 얽힌다는 설정은 SF답다.

우주가 평면이 아니고 공간이어서

중력에 따라 곡률이 생기는 것처럼,

어쩌면 시간도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흐른다면

과거, 현재, 미래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다.


브라이언 그린은

『엔드 오브 타임』(와이즈베리, 2021)에서

“뉴턴의 고전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수십 명의 물리학자들이 개발한 양자물리학은

한 가지 확고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떤 이론이건, 물리 법칙은

과거와 미래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라면서,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고 해서 수학적으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으며,

물리 법칙은

미래로 가는 시간과 과거로 가는 시간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울산 반구대가

현재와 과거를 웜홀처럼 가로질러 건널 수 있는 시공간 왜곡 지점이라면,

『사라질 아이』는 타임슬립(time slip) SF로 보아도 좋겠다.


그리고 이때 ‘사라진 아이’가 아니라

‘사라질 아이’라는 책 제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준수가 처음에

더벅머리 베옷 차림을 한 또래 소년과 마주쳤을 때 당황하지 않았던 까닭은

저 혼자 길을 잘못 들어 원시 체험장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북이족 마을 사람들도

준수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상황은 살짝 의아하다.

그런데 나중에

준수보다 먼저, 옷이나 머리 모양이 준수처럼 이상한 아이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올해 고래잡이는 여섯 명을 뽑는다. 먼저 파도 헤쳐 가기로 열여섯 명을 뽑고, 통나무배 타기에서 열 명으로 줄인다. 마지막 작살꽂기로 여섯 명의 고래잡이가 가려진다. 으뜸 고래잡이가 뽑히길 바란다!” -103쪽.


준수가

고래잡이 뽑기 대회에서 고래잡이로 선발되면서

암각화는

고래잡이들을 위한 가르침장이라는 사실이 독자에게도 알려진다.

작가는

사실적인 고래사냥 묘사를 구현하여,

가족의 죽음에 자책하는 21세기 준수와

신석기 시대 고래이빨이 만나 치유되는 이야기를 그려내었다.

그리고 전명진 화가는

반구대 암각화 못지않은 고래 그림으로 제대로 한몫을 해낸다.


이 책의 배경이 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에서 3500년 전 사이 신석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회화작품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을 담고 있는

세계적인 유산이다.(출처;울산암각화박물관)

1993년 MBC에서,

왕릉 도굴과 신라 토우를 소재로 삼은 『흙꼭두장군』(김병규, 서강출판사, 1990)을

국내 첫 창작동화 애니메이션으로 방영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반도 선사시대를 다룬 『사라질 아이』를

대한민국 SF 애니메이션으로 만날 수 있어도 좋겠다.


- 출처:《시와 동화》 202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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