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 고구려를 엿보다

노마드 비평 4. 『고구려 아이 가람뫼』,이경순

by nomadic critic

성질 급한 떡갈나무는

그새 언덕을 갈색으로 물들이며 가을 문턱을 넘고 있었다. -15쪽


『고구려 아이 가람뫼』 시작 부분이다.

지구는 1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돌고,

이 책이 출간된 2021년으로부터

지구가 태양을 1500번도 넘게 공전하기 전인 고구려 땅에도

가을은 이렇게 왔을 것이다.


디지털 현실인 메타버스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시점에서,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실제 세상을 디지털로 구현하는 기술

- <이슈 PICK 쌤과 함께> 57회, KBS1, 2021/9/26)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컴퓨터 안에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드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도 확인된다.

(<SBS 스페셜> 629회, SBS, 2021/8/15)

“채팅 로봇 시스템, 얼굴 생성, 음성 생성”이라는

세 가지 기술을 융합하여 디지털 트윈을 만드는 이 사람을

아마존 원주민 조에족과 나란히 세우면,

21세기 지구에는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고조를 찾아서」(이지은, 사계절, 2020)에서는

역사 공부를 위해 주인공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지만,

『고구려 아이 가람뫼』를 펼친 독자는

고구려 시공간에 뚝 떨어지고 만다.

2018년 지구와 2081년 지구를 평행우주로 설정한

『우주로 가는 계단』(전수경, 창비, 2019)에서처럼

평행우주마다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면,

가람뫼가 살고 있을 어느 평행우주를 떠올려도 좋을까?


SF는 ‘과학(적 사실)+문학(적 상상력)’이고,

역사동화는 ‘역사(적 사실)+문학(적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SF는 과학적 사실에,

역사동화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때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고구려 아이 가람뫼』는,

“등자, 둥근 고리칼, 못 신, 미늘갑옷 등

세계적으로 뛰어난 무기를 쏟아 내며 막강한 기마 군단이 활약했던,

고구려군의 용맹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고증에도 충실하다.


타마로는 발걸이에 의지한 채 몸을 뒤로 확 돌려 적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발걸이가 버팀목 역할을 해서 쉽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175쪽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말 위에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동작’이 가능한 까닭은

바로 ‘등자’ 덕분이다.

별명이 “말타기의 신”인 차울리가 만든

“칡넝쿨로 만든 발걸이”다.


그리고 차울리보다 겨우 너덧 살 많았던

열여덟 살 영락대왕(391~412 재위)은 연노부이면서도,

계루부 평민인 차울리에게 서슴없이 물어서

‘칡넝쿨 고리’를 배워 간다.

왕은 비려국 정벌 때 기병들에게

“말안장에 가죽 끈을 연결해서 둥글게 쇠로 만든 발걸이”로 개량한

등자와 고리칼을 보급함으로써,

전쟁터에서 군사력을 높일 뿐 아니라

사상자와 부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


“도구를 이용해 더 나아지면 좋은 거지.

사람 능력으로 빨리 못 달리기 때문에 말을 길들여” 탄다고 말하는 계수을처럼

“인간 능력 증강 체계와

이를 통해 증강된 인간의 힘이라는 발상”(에이드리엔 메이어, 『신과 로봇』, 을유문화사, 2020)은

5세기 고구려나 21세기 미국이나 같다.

고구려의 뛰어난 무기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특수한 전투 상황에서

부하들을 보호하려고 고안된

“로봇 방식의 외골격으로 이루어진 미래형 전투복”인 ‘탈로스’와 일맥상통한다.


계수을은 고추가의 딸이지만,

군사들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장군이 되고자

굳이 평민들이 다니는 경당에 나온다.

작가는

연개소문 여동생 연수영 장군1)을 근거로 삼아서,

어쩌면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실존했을 수도 있는 여장군을 상정한다.

황후가 될 수도 있는 신분인 계수을도

“방향을 바꿀 때 말이랑 한 몸 같아 아주 대단한” 칡넝쿨 발걸이를 배우고 싶어했고,

계수을 덕분에 차울리는

고추가 나리 대장간에서 ‘둥근 고리칼’도 현실화한다.


목검 손잡이 끝에 가죽 끈 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고리는 손잡이 끝에 뚫은 구멍에 연결되어 있었다. -139쪽


「작가의 말」에서

1998년에 출간된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문학사상사)가

장천 1호분 도굴 소식을 듣고 쓴 작품이며

도굴된 벽화 속 가람뫼를 만나

고구려로 시간 여행을 하는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고구려 아이 가람뫼』는

25년 전에 출간된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의

프리퀄(prequel)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천 1호분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작가는 광개토태왕으로 불리는 영락대왕 재위 기간과

엇비슷한 시간대로 설정함으로써

진정성을 획득한다.


“끝없는 재미로 넘치는 고구려 역사 속에 빠져들게 하고,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우는 작품”(「추천의 말」, 이재철, 유안진, 정채봉)이라는 심사평을 받았던

‘2,000만 원 고료 삼성문학상 수상작’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1998) 초판본 본문에서는

장천 1호분 벽화 사진 일부를 볼 수 있고,

2002년 재출간된 책(도서출판 창해)에는

부록으로 장천 1호분 벽화들 사진을 함께 실었다.

그런데 정작 『고구려 아이 가람뫼』에서는

영락대왕 어명에 따라

젊은 화공 마오리가 가람뫼를 그려 넣은 벽화가 장천 1호분이라는 내용과 함께

벽화 사진이 빠져 있어 무척 아쉽다.


”신발 바닥에 쇠를 대고 거기다 뾰족한 정을 박으면 어떨까요?“ -164쪽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못 신’은

가죽 신발이 발걸이에서 쉬이 벗겨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전투 도중 적군을 말 위에서 내려찍는 데 위력을 발휘”

(원작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4』, 효형출판, 2002)할 수 있다.

그리고 ‘찰갑’은

자칫 ‘철갑’의 오자(誤字)로 읽힐 수 있지만,

사실은 작은 미늘조각들을 가죽끈으로 이어붙여서 만든 ‘미늘갑옷’이다.

이때 ‘미늘’은

갑옷에 단 비늘 모양의 쇠붙이나 가죽 조각을 말하는데,

“갑옷은 철편을 이어 붙인 찰갑이었다.

이것은 가볍고도 튼튼해서

웬만한 화살은 튕겨 나”(『역사스페셜 4』)갔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찰갑’ 설명과 장천 1호분 벽화 사진을 실었더라면,

고구려를 엿보는 느낌이 아니라

역사책처럼 읽혔겠다.


“찰갑으로 무장한 우리 기병과

새로운 무기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그들도 극도로 예민해져 있대.” -186쪽


작가는

하루빨리 벽화를 되찾아서

건강한 모습의 가람뫼를 만날 수 있도록 소망하는 마음으로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가람뫼의 능력으로 시간의 통로를 열어

동맹 대회와 안시성 싸움을 직접 체험했던

1997년 6학년 사총사가

서른여덟 살이 된 2022년까지

벽화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경순 작가는,

『고구려 아이 가람뫼』에서 잃어버린 고분 벽화를 환기시키는 대신

독자들을 아예 고구려로 데리고 가서,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존속한 왕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깨닫게 만든다.

여기에서 화공이 되고 싶은 마오리가

“하늘의 별자리, 천부경, 역사 이야기……,

많이 알면 그림도 훨씬 풍성하게 그려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경당에 나온다면서

슬쩍 끼워 넣은 천문도는

이스터 에그(easter egg)처럼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 중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은 모두 95기다.

그 가운데 22개의 고분 천장에 별자리가 있다. …

고구려 천문도의 흔적이 다시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천 년 후

조선초 태조 4년(1395)에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원작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2000)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거대한 무덤 돌 덮개에 이 북두칠성을 새겼다.” -75쪽


작가가 고구려 3부작을 생각하며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 본문에서 ‘시간 여행’을 언급하고

『고구려 아이 가람뫼』에서는 별자리 이야기를 꺼낸 까닭에,

3부는

앞으로 지구가 1500번쯤 더 공전한 시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즐겁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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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우리나라에도 여장군이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수영 장군입니다.

연 장군은 지금 보고 계시는 이 석성의 성주로 해군 사령관이었습니다.”

- 이경순, 『녹색 일기장』, 키다리, 2014, 48~49쪽.


- 출처: 《어린이와 문학》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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