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역사를 날줄로, 오늘 역사를 씨줄로 엮다

노마드 비평 2. 『파랑 머리 할머니』, 이경순

by nomadic critic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처럼 쉬운 것은 없다. 반대로 …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글을 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쇼펜하우어 문장론』(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지훈출판사, 2005)에 나오는 글이다.

중학년 동화 『파랑 머리 할머니』는 쉽게 읽히지만,

누구라도 쉽게 쓰기 힘들 테고,

등단한 지 20년 넘은 중견 작가도 쉽게 쓰지는 않았으리라.


도희는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랐다.

엄마는 그때마다 가출을 했고,

아빠가 다리를 다쳐 일자리를 잃자 더 자주, 더 오래 집을 나갔다.


도희는

엄마가 언제 또 집을 나갈지 몰라 늘 두렵고 불안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 아빠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97쪽)


작가는,

태어나서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울타리에서조차 주눅들었을 도희 마음까지 알아차릴 만큼

오래 지켜보고 깊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가정에서 방치된 도희와 도규라도

등을 꼿꼿이 펴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파랑 머리 할머니를

남매 옆에 세워 주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

무엇이든 거저 주는 법이 없다.

도희와 도규에게 세탁기 돌리는 법과

안전하게 영양 라면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폐지 줍는 일부터 도우라는 조건을 내건다.

가장 필요한 것을 당당하게 받는 법을 제대로 알려 준다.

작가는

신문 기사나 뉴스처럼 피폐한 상황을 곧이곧대로 눈앞에 들이대지도,

삭막한 현실에 단단히 뿌리 내리지 못한 아이들에게 ‘조건 없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으면서,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어야 할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미쁘다.


그리고 할머니는

도희와 도규에게

엄마 없는 티가 나지 않게 다니라는 처세술 대신

“오소리도 제 집 청소는 제가 한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몸과 발을 싹싹 털고.”,

“사람이 오소리보다 못해서야 쓰겠냐.”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래서 파랑 머리 할머니 출현은 더 고맙다.


‘작가의 말’을 보면,

“집을 나간 엄마가 어느 날 돌아와서 가구를 가져갔다.

아이는 좋아하는 가구를 붙들고 ‘이건 두고 엄마만 가!’라고 외쳤다.”라는

오래전에 읽은 기사 내용을 모티프로 삼아

『파랑 머리 할머니』를 썼다고 한다.

또 한국아동문학인협회 2020년 4분기 우수작품상을 받은

단편 동화 「꽃 주머니」(《열린아동문학》 2020 겨울)는

몇 년 전, 외진 골목길 나무의자 위에서 실제로 보았던

향기 주머니를 사진에 담고 가슴에 품었다가

잊지 않고 풀어냈다고 밝히고 있다.

(제107호 한국아동문학인협회보, 2020년 12월 31일 발행)

우리가 지나온 역사뿐 아니라,

‘오늘 여기’ 역사를 기록하는 작가이다.


이경순은

1997년 장편 동화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

(문학사상사, 1998)로 삼성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고,

첫 청소년 소설 『녹색 일기장』(키다리, 2014)에서는

주인공을 내세워 고조선, 고구려, 발해, 부여의 활동 무대였던

동북삼성 지역 현장을 여행하더니,

『용감무쌍 오총사와 수상한 소금 전쟁』(개암나무, 2015)에서는

시공간적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를 복원해 내었다.

그리고 다시, 『파랑 머리 할머니』에서는

‘암행어사’라는 조선 시대 벼슬을 끌어와 풀어나간다.


그나저나 ‘암행 할머니’라니!

도희 남매에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할머니는

정말 암행어사처럼 문제를 해결해 준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에 있었던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전국을 다니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그릇된 일을 바로잡았다면서,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과 사회 약자들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날에도 암행어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작가는

“너도나도 ‘암행 어른’인 세상”을 꿈꾼다.

오늘 역사를 씨줄로 삼고,

어제 역사를 날줄로 엮어,

올제 역사를 써내려는 작가를 응원한다.


이 책은 그림도 참하다.

본문에는 “과일 가게”라고만 나오는데,

13쪽 그림에서 과일 가게 이름은 ‘우리 과일’이다.

그림작가도 도희와 도규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는 듯하다.

더구나 이 책에서 흑백 그림은 딱 한 군데인데,

바로 파랑 머리 할머니 기사가 실린 신문이다.

폐지를 팔아 모은 백만 원을 기부한 할머니가

신원을 밝히지 않고 인터뷰와 사진을 모두 거부했다는 내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암행 할머니가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이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아이들은 미래다.

아이들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동화는 아이들을 바꿀 수 있다.”1)

그러므로 『파랑 머리 할머니』 독자들이

올제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암행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기를!


언어에는 사회성이 있다.

『프린들 주세요』(『Frindle』, 앤드루 클레먼츠, 사계절, 1996)는

“사전에 나오는 말은 바로 ‘우리’가 만드는 거란다.”라는

국어 선생님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어느 날부터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가,

최신 개정판 웹스터 대학 사전 541쪽에 ‘Frindle’이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파랑 머리 할머니』 독자들이

“새활용”(2012년 8월 22일 국립국어원 제8차 말다듬기위원회 회의에서 “업사이클”의 순화어로 제시되었다.)

낱말을 더 자주 쓰면,

우리는 ‘업사이클링’보다 ‘새활용’이 더 익숙해질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라면,

길에서 폐지 줍는 사람을 볼 때

지구를 지키는 “엄청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

값진 일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욕심을 내고 싶다.

휴대 전화가 없는 도희는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도규에게 연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고 나오니까,

연지가 도규로부터 전화 받을 일은 드물 터이다.

그러므로 짝꿍 연지가,

도규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걱정스러운 손길로 도희에게 건넸다면 더 좋았겠다.

비록 “귀찮은 표정”을 짓는 연지가 지극히 현실적이더라도,

“소설이 ‘이러하다’를 쓴다면, 동화는 ‘이랬으면’을”2) 쓰는 장르니까.

그러면 파랑 머리 할머니가 암행을 떠나도,

도희는 상냥한 짝꿍과 함께 이 세상을 버텨 나갈 수 있겠지.

그리고 어린 독자들도

‘암행 어린이’까지는 아니어도 연지를 닮을 수 있도록.

도희 남매에게 악역은,

가출했다가 책상까지 가져가려는 목적으로 집에 들른 엄마만으로도 충분하다.


“괜찮은 책이 괜찮은 까닭 가운데 하나는

다른 괜찮은 책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는 사실이다.”3)

이경순은 『녹색 일기장』에서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에게 까뮈와 헤세를,

『낯선 동행』(답게, 2019)에서는

앙드레 지드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파랑 머리 할머니』에서는 드디어

우리나라 그림책 『황소 아저씨』(글 권정생, 그림 정승각)를 소개하고 있어서 반갑다.

그래서 기꺼이 별 하나 더 보태고 싶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나라 좋은 책들이

우리나라 작가 작품들에서

자꾸자꾸 되새김질 되어 명작으로 살아남기 바란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셰익스피어를 불러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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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고, 〈장애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책에서 만나는 장애, 현실에서 마주치는 장애〉,

《아침햇살》, 2004 가을, 134쪽.

2) 강정규, 『작법은 없다』, 시와 동화, 2020. 210쪽.

3) 졸고, 〈찬란하라, 날나리 클럽!〉, 《어린이책이야기》, 2015 봄, 243쪽.


- 출처:《시와 동화》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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