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을 받던 날
선생님은 말했다.
“당신은 하얀 도화지 같아요.”
…
주변이 납득할 만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
나는 나를 지우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다.
거품망 위 세안제는
눈, 코, 입을 차례로 삼키고
거울은 낯선 백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위에 다시
그의 웃음을 흉내 낸 얼굴을 그린다.
파운데이션, 눈썹, 입술
모두 그의 취향으로 맞춰진 설계도.
그가 묻는다.
“뭘 좋아해?”
나는 그의 입술을 빌려 대답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내 목소리는 점점 얇아지고
내 얼굴은 점점 무거워진다.
책장을 넘기며, 영상을 훑으며
내가 아닌 그의 말만 준비한다.
오늘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씻기지 않는 마음의 얼룩뿐.
다행히 내가 만난 남자는
더없이 착했다.
내가 좋아할 것들을 먼저 고민하며
“여자들이 이곳을 좋아하더라,
너도 좋아할 것 같아”
하며 이끌어주었다.
그 배려가 마음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