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화지

by 소이

심리상담을 받던 날

선생님은 말했다.

“당신은 하얀 도화지 같아요.”



주변이 납득할 만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

나는 나를 지우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다.


거품망 위 세안제는

눈, 코, 입을 차례로 삼키고

거울은 낯선 백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위에 다시

그의 웃음을 흉내 낸 얼굴을 그린다.

파운데이션, 눈썹, 입술

모두 그의 취향으로 맞춰진 설계도.


그가 묻는다.

“뭘 좋아해?”

나는 그의 입술을 빌려 대답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내 목소리는 점점 얇아지고

내 얼굴은 점점 무거워진다.

책장을 넘기며, 영상을 훑으며

내가 아닌 그의 말만 준비한다.


오늘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씻기지 않는 마음의 얼룩뿐.


다행히 내가 만난 남자는

더없이 착했다.

내가 좋아할 것들을 먼저 고민하며

“여자들이 이곳을 좋아하더라,

너도 좋아할 것 같아”

하며 이끌어주었다.


그 배려가 마음을 열었다.


월,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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