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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난했지만, 우리 집은 조금씩 일어서고 있었다.

8화. 아직도 가난했지만, 우리 집은 조금씩 일어서고 있었다

by 무명 흙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햄버거집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력이 쌓이니 일도 수월해졌고, 월급도 조금은 늘었다.
물론 그래봤자 백만 원은 넘기지 못했다.
그 시절 시급이 4,860원이었고, 한 달에 많으면 80만 원 가까이 벌었다.

그땐 정말 일만 하며 지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점점 줄었고,
학교 – 일 – 집.
하루하루가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 속에 갇혀 살았다.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단지 공부가 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학교도 성실히 다니지 않았다.
무단결석, 무단조퇴… 출결 이력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학교는 가기 싫고, 집엔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돈은 벌어야 했고, 세상 밖은 그래도 내 편 같았다.

나처럼 학교를 땡땡이 치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 애들과 어울려 알바 시간 전까지 시간을 보내다 가게로 향하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나는 집에 돈 한 푼 보태지 않았다.
왜냐하면…
점점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가난하게 살지 말자.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살자."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내 돈은 오직 나를 위해 써야 했다.

중학교 때 들은 말이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제 네 용돈이랑 필요한 생활비는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말이 나를 바꿔놓았다.
그 이후로 나는 우리 집이 개인주의구나 도움을 바라면 안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벌어서 내 용돈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집안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건강을 회복하셔서 다시 무속인 일을 하셨고,
아빠도 영업택시로 예전보다 약 두배정도 더 벌기 시작하셨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부자가 된 건 아니다.
단지 늘 세 달치씩 밀리던 공과금과 월세가
이제는 간혹 한 달 정도만 밀리는 수준이 된 것뿐이었다.
그 정도로도 우리는 나아졌다고 느꼈다.

그땐 월세가 30만 원이었다.
공과금까지 합쳐도 50만 원이 채 안 됐을 텐데,
그 50만 원이 없어서 연체되고, 쩔쩔매는 일이 반복됐다.

먹는 것도 여전히 넉넉하진 않았다.
소고기는 정말 보기 힘들었고,

예전에는 김치찌개 하나로 일주일을 버티곤 했는데,
이젠 김치찌개 하나로 2-3일, 그 다음엔 또 다른 반찬으로 2-3일.
밑반찬은 늘 비슷했다.
김치, 콩나물, 그리고 계란후라이.
그마저도 매일은 아니고, 가끔.

반찬은 다 먹을 때까지 계속 먹었다.
싸고 양이 많은 재료들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우리 집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일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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