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휴가

내가 진짜 원하는 삶.

결혼 후 지금껏, 진정한 의미의 ‘휴가’라는 걸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늘 여름이면 강원도 고성, 바닷가 시댁으로 향했다. 작고 아름다운 바다 마을이지만, 그곳을 향하는 고속도로는 언제나 꽉 막혔다. 반나절은 도로 위에서 흘려보내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하고 아쉬운 시간 들, 그런데도 이상하게 좋은 기억이 더 많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자주 내려갔지만,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횟수가 줄었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엔 더 뜸해졌다. 시댁만 아니라면 그곳은 나와 아이들에게 최고의 휴가지다. 집 앞이 바로 바다였고, 모래사장과 파도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였다. 그런데, ‘시댁만 아니라면’이라는 마음이 내내 발목을 잡았다.


여름마다 가지만, 나는 밥하고 눈치 보고, 몸과 마음이 더 피곤해졌다. 서울에선 다정한 남편도 어머님 앞에서는 달라졌다. 그는 당연한 듯 대접받고 싶어 했고, 나는 그런 남편을 속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시어머님은 현명하고 세상 물정에도 밝으신 분이다. 하지만 고집이 세고, 아들과 딸들만 인정하는 마음은 며느리와 사위를 늘 조금 바깥으로 밀어내곤 했다. 나도 한때는 어머니의 마음 그릇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선택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시는지, 그 마음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화가 치밀곤 했다. 그리고 늘, 남편에게 그 감정의 조각들을 쏟아내곤 했다.


오래전 기억. 내가 유치원에 갓 들어갔던 시절, 경기도 송추계곡으로 가족여행을 갔었다. 짐을 한가득 챙기던 엄마, 들뜬 얼굴로 웃던 아빠. 천막을 치고, 계곡물에 수박과 복숭아, 참외를 담가두던 그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원한 물에 빠져 놀던 세 남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던 그 시간. 그때는 몰랐다. 그 기억이 평생 내게 가장 소중한 휴가로 남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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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꿈꾼다. 혼자만의 여행을. 방 안에서 며칠이고 뒹굴며 쉬는 그런 휴가. 드라마 정주행, 음악 듣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쉼.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여행을.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감탄하는 법을 잊었다.


파란 하늘을 보고도, 푸른 산을 마주하고도 감탄하지 못했다. 여린 성격 탓일까. 아니면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걸까. 어릴 적 나는 혼자 인형 놀이를 하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뭔지 몰랐다. 엄마는 무서웠고, 그분의 말은 곧 법이었다.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총싸움 놀이는 난, 늘 ‘죽는 역할’을 해야 했고 그런 내 모습이 놀이를 한정 짓게 됐던 모습이지만, 그게 싫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작 나는 그것조차 불편하지 않았다. 조용했지만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이쁘장한 아이로 언제나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줬으니까. 하지만 그 무심한 성격이 공부에도,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 무던하고 신중한 듯 보였지만 내면엔 늘 조급함이 앞섰기 때문에 늘 빠른 결론을 원했고, 이성적인 설명엔 쉽게 지루해졌다. 듣지 않아도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모르면서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결국엔 안 좋은 습관으로 이어졌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미안한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은 활동적인 사람이다. 드라이브를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길 원한다. 풍경을 보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하고, “다음엔 당신과 꼭 같이 오고 싶다”라고 말해주는 사람. 덕분에 정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사랑을 키워 연인이 되고 서로를 알아가면서도 결국엔 각자 살아온 가정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결혼을 통해 몸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늘 미안하다. ‘잘 노는 법’을 알지 못하는 엄마 밑에서, 그들의 유년은 조금 덜 빛났을지 모른다.


꼭 움직여야 여행일까. 나는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멈춰있는 휴식을 원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 속에서 나를 찾는다. 그러나 남편은, 그 반대다.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줄 특정장소를 찾아가고, 먹고, 마시고, 느끼는 걸 좋아한다. 어쩌면, 그의 부모님이 평생 바닷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기에, 그는 더더욱 떠나고, 누리고, 즐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 세대가 그랬듯, 그들도 여유를 알지 못했을 테니까.


"행복해지려면 본인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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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사랑한다. 실제로 떠나지 않아도, 상상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걸 이제 안다.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페르난두 페소아처럼, 삶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속 어디든 갈 수 있다.

너무 멋진 말이지 않은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 진짜 자유를 느끼는 삶… 내면의 세계로부터 터져 나오는 말,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외칠 때 내 안에 꾹꾹 눌러 담아뒀던 욕망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아서 혼자 훌쩍 떠나도, 누군가와 함께 나눠도 참 괜찮을 나라를 꿈꾼다.


“여유로운 삶”을 사랑한다. 단순한 여행보다도 좀 더 깊은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동경. 그렇다면 떠나는 것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상상해 보는 것도 절대 도피가 아닌, 그건 변화를 위한 정당한 권리.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삶 역시 수많은 여행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가 “여행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것

(“Viajar é para os que não sentem”)”이라는 의미의 문장을 남긴 곳은 그의 헤테로님(異名) 중 하나인 '베르나르두 수아레스(Bernardo Soares)'의 작품, 바로 『불안의 서』(Livro do Desassossego) 이 책은

전통적인 소설 형식이 아니고, 일기이자 몽상록이자 철학적 파편들의 모음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도 "어딘가에 딱 정리된 문장"이라기보단, 책의 수많은 단상 중 하나로 흘러나온다.

그 문맥을 보면, 외부의 세계보다 자기 내면의 세계가 더 크고 넓다고 믿는 수아레스의 시선이 드러난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행을 혐오한다. 내 안에서 세상은 충분히 크다.”


이런 감성, 나랑 좀 통한다. 나처럼 건조한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ㅎ

글에서 드러나는 건조함이 꼭 그 내면까지 감성적이지 않은 것은 아닐 테지만 아무튼, 현실에서 도피하는 여행보다, 마음속 고요함을 탐험하는 삶. 페소아의 그 깊고 외로운 리스본의 방에서 뿜어져 나온 문장들, 지금처럼 삶을 되짚어볼 때 꽤 짙은 여운을 남겨준다. 그렇기에 더더욱 페소아는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시인이며 작가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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