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창밖으로 가을이 완연하게 무르익어 갑니다. 개학 후 한 달이 지났습니다. 무르익은 가을만큼 6학년 2학기도 한창 진행 중입니다.
6학년 2학기는 1학기와 사뭇 그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졸업을 앞두고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기임을 실감하며 아이들은 콧대가 놓아집니다. 더 이상 어린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벌써 중학생인 냥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2학기는 자잘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제 2학기가 막 한 달 지났을 뿐인데, 1학기의 평안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선생님은 '오늘도 무사히'를 외치며 하루를 이어갑니다.
그 와중에도 몇몇 아이들은 작은 행복을 찾으며 일상을 이어갑니다. 운동을 잘하고, 운동에 관심이 많은 두 아이가 최근 틈만 나면 토론에 열을 올립니다.
농구가 더 힘들까? 축구가 더 힘들까?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둘러앉아 수업 시간에 배운 갖은 근거와 자료를 들이대며 서로의 입장을 피력합니다. 학년 당 10 학급이 넘는 대규모 학교라 실상 체육 시간에도 운동장과 체육관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축구와 농구는커녕 달리기조차 꿈꿀 수 없는 형편이지요.
끝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토론이 며칠째 이어집니다. 지루하게 이어진 토론은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선생님, 그런데 왜 우리 학교는 체육시간에 축구랑 농구를 못 해요?
6학년 아이들이라 학교 사정은 이해하지만, 여전히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게 불만입니다. 불만 어린아이들의 표정에 옛 생각이 떠올라 선생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스며듭니다.
2008년, 27살의 어린 선생님은 6학년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했습니다. 심판이 되기도 하고, 선수가 되어 뛰기도 하고, 짝축구로 변형해 아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뛰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지난 시절 이야기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선생님도 예전에는 학생들이랑 같이 축구했었는데...
선생님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선생님을 졸라봅니다.
-선생님, 그럼 저희랑도 해요!
-그땐 체육선생님이 없어서 선생님이 체육을 가르쳤어. 무엇보다 27살이었지.
-어! 작년이었잖아요. 선생님, 28살이면 지금도 뛸 수 있어요.
아이는 너스레를 떨며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순식간에 20대로 만들어버립니다. 아이의 말에 가슴속 깊은 속에 숨어있던 기억 한 조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27살의 어린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누볐습니다. 짝축구를 하던 날, 당시 여학생 숫자가 모자라 저희 반에서 가장 빠른 친구 하나와 짝이 되었습니다. 아이의 달리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선생님은 제 발에 걸려 운동장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부끄러워 아픈 것도 모른 채 툭툭 털고 일어나 보려 했지만, 호되게 넘어진 선생님은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조차 없었지요. "선생님, 괜찮으세요?"라고 놀란 토끼 눈으로 뛰어온 아이가 저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부끄러워하는 선생님과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걱정하는 아이는 결국 서로를 바라보다 빵 터진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20년 가까이 흘러버렸건만, 함께 축구를 하자는 아이의 한 마디에 18년 전 선생님의 부끄러움 한 조각과 아이의 웃음 섞인 걱정 한 조각이 떠올라 선생님 혼자서 연신 웃어댑니다.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을 청소하던 중, 3월 첫날 아이들이 정리한 학습지 한 뭉치를 교탁 한 구석에서 발견했습니다.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케케묵은 2025년 3월 첫날의 기억이었습니다. 종이쓰레기로 분류하기 전 학습지를 한 장씩 넘겨봅니다. 3월 첫 만남의 긴장감이 아이들 글씨체에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선생님 이름을 엉뚱하게 써 두었습니다. 아마 제 소개를 빨리 하고 넘어가 제대로 따라 쓸 시간이 없었나 봅니다.
이튿날 쉬는 시간 아이를 불러 3월 첫날의 학습지를 슬쩍 보여줍니다. 엉뚱한 이름이 적혀있는 자신의 학습지를 본 아이의 얼굴이 가을빛처럼 빨갛게 물들어 갑니다. 그날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고, 선생님이 슬라이드를 너무 빨리 넘겼다고, 그래서 그렇게 쓴 것 같다고 횡설수설하며 설명을 이어갑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속상했다고 판단했던지 당황한 얼굴로 연신 미안해하며 사과합니다.
그런 의미로 부른 게 아니었는데. 단지 우리가 첫날 함께 지나온 시간을 아이와 함께 추억하고 싶어, 그날의 일상을 재미있는 이야기의 한 조각으로 남기고 싶어 학습지를 보여주었던 건데.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아이는 선생님 마음을 알아차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함께 웃어 보입니다.
때론 행복하기도, 때론 속상하기도, 때론 화가 나기도, 때론 배를 움켜쥐고 깔깔 웃어대던 이 모든 순간의 감정들은 다가올 시간의 흐름 앞에 가슴속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겠지요. 그러다 문뜩 누군가 마음을 휘젓는 순간, 옛 기억의 한 조각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르겠지요.
과거에 함께 했던, 혹은 앞으로 겪게 될 모든 순간들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시간과 함께 마음속 저편 어딘가로 가라앉을 겁니다. 저와 아이들이 함께 나눈 시간도 세월이 흐르면 기억 속 흐릿한 추억으로 가라앉아 사라지겠지요. 사라질 기억들이라고 해도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좀 더 담아주고 싶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 '2025년', '6학년', '열세 살'이라는 기억의 그릇을 흔들어 보았을 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따스하고 포근한 기억의 조각을 하나라도 건져낼 수 있도록. 그 조각을 보고 '나 이때 참 즐거웠어'라고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담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