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담임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1년은 짧지만 긴 시간입니다. 1년은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1년은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지요.
교사는 단순히 교과서에 있는 내용만 아이들에게 전달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루 6~7시간 내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초등학교 교사는 생각보다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2학기에 들어서면 그 변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에게서 문득문득 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특히나 선생님을 좋아하는 저학년 아이들은 그 변화는 더 확연하게 나타나지요. 아이들은 1학기 내내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체득하고, 선생님의 취향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본인들의 취향을 바꿔갑니다. 선생님이 자주 쓰는 말투가 아이들의 입버릇에 녹아들어 갑니다. 선생님의 칠판 글씨와 공책 글씨도 닮아갑니다. 심지어 선생님의 표정, 손짓, 발걸음까지 닮아가지요.
올해 아이들은 6학년, 사춘기 아이들답지 않게 변화의 폭이 제법 눈에 띕니다. 마치 저학년 아이들이 변하는 것처럼 2학기에 들어서니 그 차이가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의 말과 말투를 따라 하고, 저처럼 행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귀엽기도 하지만 생각이 많아집니다. 좋은 점만 배웠으면 좋겠는데, 닮지 말아야 할 점까지 따라 해버리니 때론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2학기 수학 시간입니다. 저는 수학을 좋아합니다. 수학은 항상 정확한 답이 있으니까요. 생각하고 고민한 만큼 깔끔하게 답을 내어주는 과목이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수학은 즐거운 과목이지요.
수학을 가르치기에 앞서 항상 아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특히 수학을 접할 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실수를 해야만 본인의 부족한 점을 알고 배울 수 있다고.
교실 칠판 한 귀퉁이에 적힌 '지과필개(知過必改)'를 가리키며 의미를 물어봅니다. 1학기부터 계속된 질문에 아이들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답이 줄줄 흘러나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반드시 고친다.
삶에서도 수학에서도 실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르는 걸 아는 척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훨씬 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선생님 이야기도 함께 들려줍니다. 선생님도 어른이지만 수시로 실수를 한다는 것을요. 대신 선생님도 너희들과 똑같이 잘못한 건 고치고, 실수한 건 사과할 거라고.
오늘도 선생님은 열심히 수학을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먼저 선생님과 문제를 함께 풀어갑니다. 아이들은 선생님 설명을 듣고 수학책에 답을 적어가며 함께 문제를 풀어냅니다.
수학책을 모두 끝내고, 수학익힘책으로 스스로 문제를 풀어보는 시간입니다.
그때 아이 하나가 살며시 손을 듭니다. "선생님... 이거..." 아이가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수학책을 가리킵니다. 수학을 잘하는 아이라 질문은 아닐 텐데, 무엇 때문에 선생님을 불렀을까요?
아이 곁으로 다가가 아이의 수학책을 차분히 살펴봅니다.
여러분은 혹시 선생님의 실수를 찾으셨나요?
차분하게 문제를 보신 분들은 찾으셨겠지요.
아, 성질 급한 선생님이 또 문제를 읽지도 않고 나누는 수와 나누어지는 수의 위치를 바꾸어 풀어버렸습니다.
요즘 진도에 허덕여 문제를 빨리 풀고 싶은 나머지 글도 읽지 않고 문제만 냅다 풀어버렸습니다. 사실 벌써 두 번째입니다. 아이가 가리킨 문제를 보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나 또 틀렸다! 당혹감을 감추며 아닌 척하는 선생님 본 아이가 옆 친구에게 속삭입니다. "선생님 얼굴이 빨개졌어."
실수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데, 실수는 생각보다 부끄럽습니다.
이걸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당당하게 말해야겠지요.
-얘들아, 문제 푸는데 방해해서 미안. 선생님이 수학 교과서에 실수한 부분이 있어. 너희도 같이 찾아볼까?
아이들이 수학익힘책을 풀다 말고 다시 수학책을 들여다봅니다. 누군가는 선생님의 실수를 곧장 찾아내고 누군가는 한참을 들여다보며 고민에 빠져듭니다.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고 선생님의 실수를 바로잡아 줍니다. 그때 아이 하나가 손을 들고 살며시 속삭입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 사실 아까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알일까요? 알고 있었으면서 왜 얘기를 안 했던 걸까요?
-뭐야!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야기 안 했어? 선생님 실수도 알려줘야 할 것 아냐!
괜스레 민망해 아이에게 원망 섞인 투정을 부려봅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배시시 웃어넘겨 버립니다. 실수는 본인이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쳐서 말을 안 한 건지, 아니면 수업 중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말을 안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제발 선생님에게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지과필개'에서 선생님이 항상 이야기한 '스스로' 잘못을 깨닫는 게 중요했던 걸까요?
아이들이 부끄러워할 때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감 포즈를 취하라고. 부끄러워질 것 같으면 어깨를 펴고, 양손을 허리에 얹고 당당한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실수를 하니 부끄럽고 어깨가 움츠러듭니다. 아니, 저도 생각을 고쳐야겠네요.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선생님이라고 신은 아닙니다. 선생님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저도 부끄러움을 뒤로 숨기고 아이들 앞에서 자신감 포즈를 취해봅니다.
그런데 얘들아, 선생님이 틀릴 때면 모른 척하지 말고 제발 좀 알려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