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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숲 그늘에 숨은 보랏빛 비밀•맥문동

계절 따라 꽃멍 숲멍(여름) | 맥문동 | 성주 성밖숲

by 새벽강

이름 없는 풀

삼십 년 전에 아파트로 처음 이사갔다. 아파트 정원은 조경이 잘 되어 있어서 철 따라 꽃이 피어났다.

어느 여름날, 그늘진 나무 아래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빽빽한 꽃대가 머금고 있는 짙은 보라색 잉크 방울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보라색 잉크가 방울방울 맺힌 듯한 맥문동 꽃

'뭘까?'

가만히 보니 평소 아파트 응달에서 자라던 '이름 없는 풀'이었다. 이 풀을 화초라고는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푸른 잎을 가졌지만, 난초만큼 우아하지도 않고 그저 화단에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부추처럼 보이지만 더 빳빳했고, 그 쓸모도 분명하지 않아 보였다.


항상 그늘이었던 제 자리를 밝히듯이 보랏빛 꽃들이 피어있었다. 꽃이 핀 뒤에서야 비로소 '맥문동'이라는 화초임을 알게 되었다. 여느 꽃이름 같지 않은 낯선 이름이었다. 맥문동(麥門冬)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보리알처럼 생겼고,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서 '동(冬)'자가 붙었다고 한다.



한여름의 성주 성밖숲 풍경

500년 된 성주 성밖숲

여름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수많은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에 비해 꽃이 귀하다. 그래서 꽃 나들이도 좀 뜸해지고 시원한 그늘을 찾게 되는 계절이다. 시원한 그늘과 여름 꽃이 함께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성주 성밖숲.


성주 성밖숲은 조선시대에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만들어진 인공림이다. 수령이 무려 300~500년으로 추정되는 왕버들 50여 그루가 큰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맥문동 군락과 산책로가 사람들의 발길을 반겨준다.


내리쬐는 땡볕 아래에서도 왕버들은 고목다운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찾아간 날의 맥문동은 아직 초록초록하다. 보랏빛 꽃은 아직 군데군데에만 조금씩 피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은 그냥 풀밭 같은 이곳이 머지않아 보랏빛으로 가득 물들 거라는 것을. , 그 꽃이 지고 나면 꽃대에 까만 열매가 조롱조롱 열릴 거라는 것도.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시절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맥문동을 닮은 우리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맥문동을 닮은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연예계나 스포츠 스타들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이 좀처럼 잘 없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존재들. 화려한 꽃밭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숲의 가장자리를 채우는 푸른 배경 같은 삶.


다른 꽃들이 화려하게 피고 질 때도, 맥문동은 그늘 아래에서 묵묵히 푸르렀다. 눈길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존재였다. 맥문동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굳이 빛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어두운 숲 그늘에서 은밀한 비밀처럼 피어난다. 그리고 꽃이 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열매를 가지에 매달아 가을의 시작을 알리고,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해도, 맥문동은 여름마다 어김없이 보랏빛을 틔운다. 그 모습은 마치 ‘숲 그늘에 숨은 보랏빛 비밀’처럼 다가간 이들에게만 속삭인다.

어쩌면 맥문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한 시선이 닿는 곳이 아니라,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빛을 내는 삶 속에 있다고. 맥문동은 이름 없는 풀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존재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왕버들 아래 맥문동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맥문동


그늘의 그림자로 숨 쉬는 풀

푸른 난초인 듯 부추잎인 듯

속삭이는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고요


늦여름 무더위 틈새

숲속 아래 펼쳐지는 비밀스런 잔치

칠흑 밤하늘에 심은 보랏빛 별자리

은은히 빛살을 풀어낸다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오직 제자리에 별을 심는

어둠 속 작은 등불

그제야 불리는 그대의 이름


보랏빛 별을 지고 나면

빈 가지에 흑진주를 매달아

가을의 길목을 밝혀준다


소나무의 굳센 마음 닮아

눈 내리는 겨울에도

지지 않는 푸른 숨결


진정한 아름다움은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아도

스스로 피어나는


경주 황성공원 밤산책 길에 활짝 핀 맥문동

맥문동 꽃말: 겸손, 인내, 기쁨의 연속


전국 맥문동 명소

- 서울 올림픽공원

- 수원 노송공원

- 울산 대왕암공원

- 성주 성밖숲

- 서천 장항 송림자연휴양림

- 경주 황성공원

- 밀양 삼문송림공원


♣새벽강's PICK

장항 송림자연휴양림은 전국 최대 맥문동 꽃밭으로 매년 맥문동 꽃축제가 열린다. 빽빽한 해송 아래 보랏빛 융단처럼 펼쳐진 맥문동 꽃을 즐길 수 있다. 2025 제3회 장항 맥문동 꽃축제 2025. 8. 28. (목) -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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