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꽃멍 숲멍(가을) | 소나무 | 경주 삼릉소나무숲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모두가 잘 아는 애국가 2절 가사다. 아마도 애국가를 들으면서 서울 남산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남산은 전국에 무려 100곳이 넘는다. 애국가 속의 남산은 서울 남산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으로 그 지역의 앞에 있는 산, '앞산'으로 봐도 좋겠다.
전국의 그 많은 남산 위에 늘 변함없이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조사에서 압도적인 비율로 항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인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사랑받는 나무다.
전국 각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지만, 소나무 명소는 따로 있다. 바로 울진 금강소나무숲이다. '명품' 소나무라고 불리는 금강송이 군락으로 있는 곳이다. 하늘 높이 쭉쭉 곧게 뻗은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겉모습도 훌륭하지만, 궁궐 건축에 사용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해 조선시대부터 조정에서 특별히 관리하던 나무다.
다른 소나무들에 비해 자라는 속도가 느려서 건축 자재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2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장관인 곳이 바로 울진 금강소나무숲이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도 사전 예약을 해야만 갈 수 있다.
쭉쭉 뻗어 멋있는 금강송이 있다면, 굽고 휘어져서 멋진 소나무도 있다.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 사진작가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다. 뿌연 새벽안갯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듯한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 사진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안강형'이라고 불리는 이 모양의 소나무는 주로 경주와 포항 등지에 많이 분포한다. 안강형 소나무 군락지의 대표적인 명소는 바로 경주 남산이다.
오늘은 솔숲을 찾아 경주 남산으로 떠난다. 경주 남산은 신라 고도 서라벌의 남쪽에 있으며, 노천 박물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왕릉과 불교 유적 등 문화재가 산재한 곳이다. 경주에 있는 왕릉은 대부분 도래솔이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삼릉숲이 가장 유명하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세 왕릉이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불린다. 삼릉 근처에는 경애왕릉(55대)이 있는데, 삼릉과 경애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도래솔 숲이 바로 삼릉숲이다.
경주나들목을 나와 서라벌대로를 따라가다 오릉네거리에서 우회전한다. 남산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삼릉숲은 남산의 서쪽에 있으므로 포석정 방향으로 가면 된다. 창밖으로 보이는 남산 자락 아래 들판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통일전까지 이어지는 들판은 은행나무 가로수와 함께 가을에 더 아름답다.
삼릉숲 입구 공영주차장에 들어간다. 아침 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는데, 이미 많은 차량이 주차 중이다. 삼릉숲이 이렇게 유명한 곳이었던가? 그 까닭은 금방 이해되었다. 주위에는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삼릉숲만 보려고 온 게 아니라 남산 등산을 위해 온 것이다.
등산객들에 섞여서 등산로 입구로 들어간다. 숲은 바로 시작된다. 사진 속에 나왔던 그 소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구불구불 서있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겹겹이 만들어 내는 공간이 신비롭고 향기롭다.
큰 소나무 숲은 피톤치드가 특히 더 많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숨만 쉬어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여기 공기가 참 좋다는 것을. 아내와 여유롭게 걸으면서 숲 사진도 찍는다.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오늘과는 다른 계절, 다른 시간에 와보는 것도 좋겠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한국화 그림이 따로 없다. 가만히 보니 왕릉 쪽으로 소나무들이 가지를 쭉 드리우고 있다. 아마도 빽빽한 숲 사이에서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고 빈 공간으로 가지를 뻗어서 그런 모습이 되었겠지만, 그 모습이 마치 왕에게 절하는 신하 같다.
삼릉에서 경애왕릉 사이에는 작은 계곡이 있지만, 다리가 있어서 쉽게 건널 수 있다. 경애왕릉은 아버지(신덕왕)와 형(경명왕)의 능에서 살짝 떨어져 있다. 그는 통일신라의 힘이 약해진 후삼국 시기에 즉위하였고, 포석정에서 견훤 군사들에게 붙잡혀 죽었다. 다른 왕릉에 비해서 규모도 작아서 쓸쓸한 느낌도 든다.
경애왕릉까지 한 바퀴 크게 돌고 나서 바위에 앉아 잠시 쉰다. 찍은 사진도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눈다.
이렇게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금강송처럼 곧게 뻗은 소나무는 건축 목재 등으로 먼저 사용되고, 휘어진 소나무는 활용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쓸모없음의 쓸모'인 셈이다.
세상에는 전적으로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그 아름다움과 쓸모도 다를 테니.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사는 소나무들이 언제나 푸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의 숨쉬기도 여유로워진다. 그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그 모습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나 자신과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마음속까지 피톤치드가 채워지는 듯하다. 솔향 가득한 마음으로 경주에서 유명한 맷돌순두부 식당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지표(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건목(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
◉소나무 꽃말: 정절, 장수
◈전국 소나무숲 명소
-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 경주 삼릉소나무숲
- 강릉 대관령 소나무숲 / 솔향수목원
- 안면도 소나무숲
- 하동 송림마을
- 김천 국립김천치유의 숲
- 제천 의림지 솔밭길
- 광주(경기) 남한산성 명품숲
♣새벽강's PICK
소나무는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조금씩 감소하고 있으나, 전국 어디에서든 소나무를 많이 만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소나무숲 중에서도 가장 각광을 받는 곳은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이다. 조선시대 궁궐을 지을 때와 왕의 관을 만들 때 사용된 나무가 생산되던 숲으로 곧고 키가 큰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산림청에서 국가숲길로 지정한 이곳은 '숲나들e' 숲길 사전 예약을 통해서 탐방이 가능하다. 2019년 개관한 체류형 산림 휴양 시설인 금강송 에코리움에서 숙박하면서 소나무숲을 즐길 수도 있다.
◈전국 유명 소나무
-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
- 예천 석송령
-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 영월 솔고개 소나무
-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 서울 청와대 녹지원 반송
*작가님이 좋아하는 근처 소나무나 소나무숲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