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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아름다운 가을에 • 국화

계절 따라 꽃멍 숲멍(가을) | 국화 | 거창 감악산

by 새벽강

죽란시사의 풍류와 낭만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에 서늘해지면

서쪽 연못에 연꽃을 구경하러 한번 모인다.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정약용 선생의 '죽란시사(竹蘭詩社)' 규약이다. 조선 최고의 지성인이 벗들과 이렇게 철마다 모여 꽃과 과일을 즐기며 시를 읊었다니, 그 풍류에 감탄하게 된다. 봄에는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필 때, 여름에는 연꽃이 필 때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나누었다. 가을에는 국화가 필 때 모였다. 깊어가는 계절의 운치를 더해주는 국화가 선비들의 풍류와 감성과도 닿아 있었나 보다.


노을의 제철

과일에도 제철이 있는 것처럼 일과 놀이에도 제철이 있다. 찬란한 계절의 빛깔이 그러하듯 말이다.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새해 첫날의 일출이 특별하듯이, 사시사철 볼 수 있는 하늘이지만 청명한 하늘은 역시 가을이 제철이다. 그 가을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과 그 아래 피어나는 국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맑고 투명한 가을 저녁에는 노을빛도 유난히 곱다. 가을 노을이 유독 아름다운 것은 과학적 이유도 있다. 대기 중 먼지와 수증기가 상대적으로 적어 파장이 긴 붉은빛이 흩어지지 않고 깊이 내려와서 그렇다고 한다.

퇴근하면서 자동차 유리창과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석양도 아름답지만, '노을 맛집'의 석양은 조금 더 특별하다. 탁 트인 바다 전체를 물들이는 서해안 낙조도 멋지고, 섬과 섬들이 까만 배경이 되어주는 남해안 낙조도 아름답다. 그리고 전망이 좋은 높은 산에서 바라보는 노을도 빼놓을 수 없다.

아스타국화와 야생 구절초가 어우러진 감악산 풍력단지(경남 거창군)

감악산 노을과 아스타 국화

노을을 보기 위해 어느 가을 오후, 경남 거창 감악산으로 향했다. 혹시 도착이 늦을까 서둘러 차를 몰았다. 정상에 다다르니, 다행히 해가 넘어가기 전이다. 그런데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를 반긴다. 산 봉우리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바로 아스타국화다. 감악산 정상에 풍력발전기를 만들면서 임도가 생겨났고, 군청에서는 그 너른 봉우리 위에 봄가을마다 꽃을 가꾸었다. 가을에는 산마루가 아스타국화로 가득 채워졌다. 보라색과 남색 그 사이, 중간중간에 분홍빛이 섞여 있어 더욱 아름답다. 주변에 억새와 야생 구절초까지 깊어지는 가을 정취를 더해준다.

꽃의 아름다움에 취할 무렵 해가 고개를 넘어간다. 노을빛이 점차 붉어진다. 옅은 구름 무리는 노을빛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커다란 바람개비 같은 풍력발전기도 배경이 된다. 꽃과 노을, 그리고 풍력발전기가 함께 어우러져 이곳의 노을 풍경은 카메라조차 내려놓을 만큼 숨 막히게 아름답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어둠이 내리자 감악산 전망대에 조명이 환하게 켜진다



죽란시사와 192

노을이 차차 푸른 어둠 속으로 사라질 무렵 거창 읍내 야경을 보면서 감악산을 내려온다. 여운이 이어진 밤에 생각해 본다. 내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면 어디쯤 온 걸까. 아마도 가을쯤이 아닐까. 푸르른 청장년기를 지나 이제 조금씩 단풍에 물들어 갈 나이다. 인생을 더 펼치기보다 조금씩 갈무리를 시작할 시기다. 살아가는 동안 꽃과 하늘을 즐기고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운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바쁜 관직 생활 속에서도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죽란시사 벗들을 만나 예술적 교감과 풍류를 나누었다. 이 모임을 통해 서로 위안도 얻고 삶도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다산 선생의 죽란시사처럼 내게도 몇몇 좋은 모임이 있다. 그중 '192'2019년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이어오고 있는 모임이다. 계절마다 네 사람이 같이 산책하고 차를 마셨다. 함께 운동도 하고 좋은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그 사이 써 둔 글을 모아 공저로 책으로 출간한 적도 있다. 지금은 각자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서로를 응원하며 여전히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감악산 노을처럼 서로에게 아름답게 물들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감사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난 모임 자리. 루이보스티와 포도알처럼 192도 계속 향기롭고 잘 영글어가길



전국 국화 명소(주로 10~11월에 개화)


알록달록 국화의 향연이 매년 열리는 대구수목원(대구 달서구)

전국 구절초 명소(주로 9~10월에 개화)

- 정읍 구절초축제

- 파주 율곡수목원

- 밀양 송림공원


전국 아스타국화 명소(주로 9~10월에 개화)

- 거창 감악산 풍력단지

- 신안 퍼플섬

- 의령 친수공원


전국 수레국화 명소(주로 6~7월에 개화)

-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

- 경주 승마장

- 서울 잠원 한강공원

- 강화 역사박물관

- 인천 인천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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