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환의 시점(유블리안)
첫 만남 이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카톡으로 몇 번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알게 된 것은 은하 씨가 생각보다 훨씬 다정하고, 귀여운 면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텍스트 너머의 그녀는 편안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애프터 신청’ 날이 밝아오자 내 심장은 다시금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장소는 식물들이 가득한 대형 카페로 잡았다. 옷차림도 신경 썼다. 과한 포마드는 생략하고, 자연스럽게 넘긴 머리에 깔끔한 네이비 니트와 슬랙스를 매치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제법, 아주 제법 괜찮아 보였다.
“후우... 도환아, 오늘은 뇌 정지 오지 말자. 침착하게, 배려있게. 알았지?”
나는 약속 장소에 20분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창가 자리, 적당한 조명, 은은한 커피 향.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이제 주인공만 등장하면 된다.
약속 시간 5분 전.
딸랑- 하고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들이마시려던 숨이 턱 하고 멈췄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은하 씨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난번 첫 만남 때의 화려했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봄바람 그 자체였다.
‘와... 진짜 예쁘다.’
심장이 쿵쾅대다 못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도환 씨! 일찍 오셨네요?”
“아, 네! 은하 씨, 어서 오세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거짓말쟁이 구도환! 20분 전부터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ㅋㅋㅋ. 하지만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척 의자를 빼주며 그녀를 맞이했다.
은하 씨가 겉옷을 벗자 은은한 꽃향기가 훅 끼쳐왔다. 지난번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감이 실감 났다.
우리는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를 시켜놓고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지난번의 ‘아무 말 대잔치’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카페 시그니처가 아인슈페너라던데, 맛이 괜찮으세요?”
“네! 크림이 진짜 달콤하고 맛있어요. 도환 씨는 쓴 커피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저는 아메리카노만 마셔서요. 은하 씨가 달달한 거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여기로 왔는데 다행이네요.”
은하 씨는 “어머, 기억하고 계셨어요? 센스쟁이시네요.”라며 까르르 웃어주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지는 게 신기해서, 나는 자꾸만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그녀를 관찰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자 우리는 카페를 나서 근처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저녁 공기는 선선했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앞서 나가려던 내 발이 멈칫했다.
‘아니지, 천천히. 은하 씨 힐 신었잖아.’
나는 슬쩍 곁눈질로 그녀의 발을 확인했다. 굽이 꽤 있는 구두였다. 나는 내 평소 보폭을 반으로 줄였다. 왼발, 그리고 잠시 쉬고 오른발. 그녀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 내 발소리를 맞췄다.
나란히 걷는 길. 우리 사이의 거리는 주먹 두 개 정도. 손등이 스칠 듯 말 듯 한 이 미묘한 거리감이 나를 미치게 했다. 잡고 싶다. 아니야, 아직은 일러. 섣불리 잡았다가 따귀 맞을 수도 있어.
나는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애써 딴청을 피웠다. 대신 온 신경을 그녀의 발걸음에 집중했다. 그녀가 잠시 풍경을 보느라 느려지면 나도 느려졌고, 그녀가 다시 걸으면 나도 걸었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은하 씨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으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내가 당황해서 묻자, 은하 씨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니요, 그냥 좋아서요.”
“네? 뭐가...”
“도환 씨, 아까부터 저한테 걸음 맞춰주고 계시잖아요. 평소엔 되게 빠르실 것 같은데.”
들켰다. 아니, 알아봐 주었다. 나의 사소한 배려를.
“아... 제가 걸음이 좀 빠른 편이라, 은하 씨 불편하실까 봐...”
내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나, 은하 씨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는 예의상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편안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설렘이 묻어있는 진짜 미소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걷고 있어요. 보통 남자분들은 자기 속도대로 가서 제가 뛰다시피 쫓아가야 할 때가 많았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를 반 뼘 정도 더 좁혔다. 이제는 옷깃이 살짝살짝 스칠 정도의 거리.
“앞으로도 계속 맞춰 드릴게요. 은하 씨가 뛰지 않게.”
이번엔 좀 멋있었나? 내 말에 은하 씨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손은 잡을지 말지 고민했지만, 발걸음 소리가 하나의 리듬처럼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또각, 뚜벅. 또각, 뚜벅.
미묘했던 거리감이 좁혀지는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