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소한 오해 지옥에서 천국으로

도환의 안절부절못하는 하루(유블리안)

by 유블리안





평화롭던 우리의 연애 전선에 예고 없는 먹구름이 드리운 건, 순전히 나의 ‘입방정’ 때문이었다.


​점심시간, 은하 씨와 카톡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은하 씨가 오늘 예약이 꽉 차서 점심도 못 먹을 것 같다고 푸념하기에, 나는 기분을 풀어준답시고 농담을 던졌다.


​[밥도 못 먹고 힘들겠다. ㅠㅠ 그럼 저번에 그 훈남 후배 불러서 샴푸라도 도와달라고 해요. ㅎㅎ]


​질투 사건 이후 우리가 자주 써먹던 농담 레퍼토리였기에 별생각 없이 보낸 톡이었다. 그런데...


​[오후 1:00] 숫자 ‘1’이 사라졌다.
[오후 3:00] 답장이 없다.
[오후 6:00] 여전히 무소식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 뭐야~ 또 질투?”라며 귀여운 이모티콘이 왔을 텐데, 채팅창은 꿀 먹은 듯 조용했다.

슬슬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 났나?’


​내가 너무 심했나? 밥도 못 먹고 예민한 사람한테 굳이 후배 얘기를 꺼내서 심기를 건드린 건가?


​[은하 씨? 바빠요?]

[미안해요 ㅠㅠ 농담이 과했죠?]


​연달아 톡을 보내봤지만, 이번에는 아예 숫자 ‘1’조차 사라지지 않았다.

차단당한 건가? 아니야, 손님 머리하고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뇌'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주인님이 저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농담으로, 저는 이제 무기한 파업에 돌입합니다.'


온갖 불길한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미용실 마감 시간이 지나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은하 씨의 미용실 앞으로 달려갔다.

연락도 없이 찾아가는 게 예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갔다간

내 심장에게 갈비뼈를 폭행당할 것만 같았다.



​찬 바람을 맞으며 닫힌 미용실 블라인드 앞을 서성인 지 20분째.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익숙한 트렌치코트 자락이 보였다. 은하 씨였다.

하루 종일 서 있었을 그녀의 표정이 무지하게 피곤하고 어두워 보였다.


​“으... 은하 씨!”


​내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문을 잠그려던 은하 씨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 도환 씨? 여기 웬일이에요?”

“아... 그게... 연락도 안 되고 걱정돼서...”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쭈물했다.


​“미안해요. 제가 아까 쓸데없는 농담을 해서 화나셨죠? 톡도 안 보시고 전화도 안 받으시길래...

제가 진짜 입이 방정, 아니 이놈에 손가락이 방정이라...”


​나는 횡설수설하며 사과부터 쏟아냈다.

은하 씨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화면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어머나 배터리 나간 줄도 몰랐네.”

“네...?”

“오늘 갑자기 예약 손님이 몰린 데다가, 이상한 클레임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 방전됐나 봐요. 도환 씨 톡 온 줄 몰랐는데... 많이 걱정했어요?”


​화난 게 아니었다. 그냥 바쁘고 배터리가 나갔을 뿐이었다.
'휴~ 다행이다.' 안도감이 밀려오자, 그제야 억울함과 서러움이 왈칵 솟구쳤다.


​“하아... 진짜... 저는 은하 씨가 화나서 저 차단한 줄 알고... 지옥을 맛봤다고요.”


​내가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리자, 은하 씨의 표정이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미안해요.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우리 구도환 씨, 맘고생 심했겠네. 얼굴이 반쪽이 됐어.”


​은하 씨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한 샴푸 향기가 났다.

나는 아직 삐진 척을 좀 더 하고 싶어서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시선을 피했다.


​“흥, 됐어요. 저 상처받아서 치유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지!은!하씨!”


​내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은하 씨가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까치발을 들고 훅 다가왔다.


​쪽.


​오른쪽 뺨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지난번 빗속에서의 사고 같은 뽀뽀와는 달랐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화해의 제스처였다.
​나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은하 씨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살짝 눈웃음을 치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 이걸로 화 풀어. 응?”


​그녀의 입에서 나온 “풀어”라는 두 글자가 내 고막을 타고 들어와 뇌세포를 녹여버렸다.

기분도 풀어지고 다리의 힘도 풀어졌다. 방금 전까지 세우고 있던 자존심의 깃발이 힘없이 툭 꺾였다.

아니, 꺾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뽑혀 나갔다.


​긴장이 탁 풀리면서 입꼬리가 주책맞게 스르르 올라갔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크흠. 음~ 한 번 더 해주면 풀게요.”

“어머, 이 남자 봐라? 은근 밝히는 남자네?”


​은하 씨가 놀란 척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짧지만 달콤한, 화해의 입맞춤이었다.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던 불안과 초조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벅차오르는 감동과 설렘만이 남았다.

나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배터리가 방전된 건 은하 씨의 휴대전화였지만, 정작 충전이 된 건 나였다.


​“다음부턴 배터리 관리 잘해요. 내 심장 관리도 잘해주고.”

“알았어요. 미안해요, 도환 씨.”


​오해는 사소했지만, 사랑은 더 깊어졌다.

나는 오늘 또다시 깨달았다.

이 여자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평생 져줘도 좋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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