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삼남의 굳은 마음을 녹였다. 아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하게 재구성된 허구이며,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엄마!”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군복 차림의 큰아들 효일이었다.
이제 곧 상병 계급장을 다는.
“아들, 왔어? 온단 얘기 없었잖아?”
삼남은 활짝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자꾸 일그러졌다.
“엄마 보고 싶어 휴가 냈어요.”
“진작 연락을 하지. 엄마가 장도 안 봤는데.”
멍하니 앉아 있던 삼남이 모처럼 바빠졌다.
거실을 돌며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였다.
효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엄마, 집에만 있지 말고 바람 쐬러 나가요.
외곽에 맛집이랑 좋은 카페가 있대요.”
효일이는 누구보다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아이였다.
운전병에 지원한 그는 지금, 삼남보다 운전을 더 잘했다.
삼남은 효일이가 언젠가부터 부모보다 더 속깊은 말을 하는 걸 볼 때면,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하는
서운함과 대견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폭풍 같은 사춘기와 치열한 입시 경쟁 속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가족을 돌아볼 줄 모르던 아이는
이제는 엄마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사랑이라는 시간의 잎파리가 돋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엄마, 이참에 좀 쉬세요. 그동안 너무 달렸잖아요.”
아들의 말은 허공을 맴도는 위로가 아니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울림으로
삼남의 가슴에 바로 와 닿았다.
두부 전골집에 마주 앉았다.
효일은 어느새 냅킨을 세모로 접어 숟가락을 놓고,
물컵에 물을 채워 엄마 앞으로 밀어주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몇 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어 있었다.
‘이런 건 언제 배운 거지….’
삼남은 순간 낯선 감탄을 했다.
“엄마가 그래 보였어?”
삼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효일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엄마는 예전부터 반 아이들한테 진심이었잖아요.
제자들에게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삼남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얼굴을 돌렸다.
그 놈의 좋은 선생님...
그 기준에 맞추려고, 자신을 갈아넣었지.
“근데, 엄마가 요즘은 별 생각이 다 들어.
잘 살아왔나 싶고,
모든 게 다 후회돼. 그렇게 열심히 하지 말걸…
너도 너무 열심히 살지 마.
군 생활도 너무 열심히 하지 마.”
효일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훈련소에서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훈련소 점수에 따라
근무지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정 받았다.
운전병 중에서도 운전을 못하면 잘 안 시킨다던데,
효일은 일주일 내내 운전으로 쉴 틈 없다고 했다.
'군 생활 열심히 해 봤자, 다 소용없어.
안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남편이 안쓰러운 마음에 한 마디하면, 효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하며 걱정말라고 했다.
삼남은 그런 효일이 어느 순간 자신처럼,
모든 노력에 배신당하고 실망할까봐 걱정됐다.
효일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열심히 살아온 게 잘못된 건 아니에요.
결과가 어떻든 과정이 중요하다고 엄마가 그러셨잖아요.
누구도 엄마를 비난할 수 없을 거에요.
확실한 건…
엄마가 우리 가족의 소중한 엄마라는 거죠.”
짜식, 똑똑한 녀석이라 내가 한 말도 잘 기억하고 있네.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효일아, 엄마가 요즘 후회가 많으니까 자꾸 이런 생각도 들어.
괜히 엄마 욕심에 대치동 와서, 너도 힘들었던 건 아닐까 하고.”
효일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듯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경쟁에 치이며 안간힘을 쓰던 시간들.
그러나 표정은 차분했다.
“힘든 건 있었지만… 저는 좋았어요.
지나고 보니까 좋은 친구도 많이 만났고,
부모님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잖아요.”
“그래? 다행이네…
아들이 엄마보다 훨씬 어른스럽네.
이 나이에도 흔들리는 못난 엄마라서 엄마가 부끄럽네.
미안해.”
삼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어릴 적엔 마흔만 넘으면 인생을 다 아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도 잘 모르겠어.”
“엄마도 사람이잖아요.
흔들릴 때도 있고, 힘든 날도 있죠.
그냥… 엄마 자체로 우리 가족에겐 충분히 소중해요.
후회도 자책도 이제 내려놓으세요.
너무 달렸어요. 엄마도 좀 쉬세요.”
그 말이 삼남의 굳은 마음을 천천히 녹였다.
아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단단한 말로 엄마를 다독였다.
삼남은 고개를 숙여 국물에 젖은 수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작은 위로가 자라나고 있었다.
아들의 웃음이 가슴 속 응어리를 덮어주었다.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따뜻한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