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각이 좋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하게 재구성된 허구이며,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택배요~."
선희가 보낸 책이 도착했다.
<단 한 번의 삶>
유명한 소설가의 신작 에세이.
선희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목만 봐도 언니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책을 배송해 주었다.
이 책은 삼남이 조금 나아진 후, 활자가 눈에 들어온 뒤에야 읽게 되었는데,
'어떤 위안'이 삼남에게 와 박혔다.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
아무 무게도 지나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중에서 -
'절대 실패하지 말아야 돼.
인생의 어느 순간도 가벼이 여겨선 안 돼.
단 한 번의 삶, 후회를 남겨선 안 돼'
늘 완벽한 삶을 꿈꾸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삼남에게
이 글이 위안이 됐다.
삶의 값이 0일 지도 모르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좀 후회해도 괜찮아.
사람들은 너한테 크게 관심 없어.
그러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
이런 위안 말이다.
"띵동"
벨소리와 동시에 톡이 울렸다.
'달달구리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더라.
케이크랑 니가 좋아하는 따까마 먹으면서 오늘 하루 조금 더 행복하길...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진짜 멋지고, 소중한 사람이야.'
따뜻한 은영 언니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는 것 같았다.
언니의 배려 깊은 마음씨에 또다시 눈물이 났다.
"나,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사랑받을 자격 있나?"
아무 쓸모 없어진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 주다니...
그 사랑, 그 호의들은
삼남의 누추하고 허기진 마음의 방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다들 시간 되시죠? 이번 모임은 참숯갈빗집입니다."
삼남에게 의사는 동료들을 만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한참을 용기 내지 못했다.
그러다 처음 용기 낸 모임이 바로 '꽃구경'이었다.
10년 전 함께 동학년으로 뭉친 모임.
처음엔 단순히 꽃구경이나 함께 하자는 의미였고,
나중엔 '우리의 만남이 인생의 꽃구경'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담았다.
당시만 해도 막내 나이가 30이 안 됐는데 지금은 마흔이 다 돼 가는.
3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근 20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가족 같은 모임이었다.
모임의 중심엔 늘 혜진 언니가 있었다.
"내가 우리 삼남이 전화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에구 지금도 눈물이 나네."
눈물 많은 혜진 언니는 앉자마자 눈물 바람이었다.
혜진은 유독 삼남이 딸 같기도 하고, 친동생 같기도 했다.
"에구, 언니... 삼남이 이제 괜찮을 걸? 괜찮지, 삼남아?"
그러면서 같이 눈물을 찍어내는 은영.
덩달아 말이 없어진 나머지들...
영수는 묵묵히 고기를 구워 삼남의 접시 위에 올렸고,
톡 쏘는 사이다 같은 말만 골라해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유리는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저도 전에 그런 적 있었어요. 그땐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고,
다 내 잘못인 것 같고, 애들을 볼 수가 없더라고요.”
항상 무슨 일이든 야무지고,
학급 관리도 똑소리 나게 하는
유리가 그랬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영수는 자신이 협찬으로 가져온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곤 낮게 말했다.
“참다 병드는 교사들, 훈육했다가 되려 고소당하는 선생님들…
저는 많이 봤어요.”
교육에 회의적이면서도 60학급 학교에서
몇 해째 생활부장을 맡아 누구보다 열심인 그였다.
"오죽하면 '교직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잖아요.
요즘 젊은 교사들 의원면직이 진짜 많대요."
아이 키우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는 유리는
고기를 두 점씩 상추에 야무지게 쌌다.
하정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좋은 교사들이 다 학교를 떠나니,
앞으로 교육에 희망이 있을까 싶어요.”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연희는 학부모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도, 저는 학부모로서 아이들 잘못에 열 내고, 안타까워하고, 내 자식처럼 사랑해 주는 선생님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요즘은 교감, 교장도 각종 민원에 시달리는 세상이니, 누구도 버티기가 어렵네. 동기 중에 암 걸린 애들도 부쩍 많고..."
“교사 연금 받는 평균 연수가 7년이래요. 버티다 버티다 퇴직하고, 이제 좀 쉬나 했더니 암이나 갖가지 병으로 부은 연금도 제대로 못 받고, 세상 떠나면 좀 억울할 것 같아요.”
“우리 시어머님도 정년 뒤, 고작 다섯 해 만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잖아요.
서른다섯 해를 교단에 서셨는데…”
하정의 시어머니 장례식에서,
모두 남 일 같지 않아 착잡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만나기만 하면 없던 식욕이 돋아 고기를
인원수의 2배는 먹어야 배가 부르던 꽃구경들이
딱 인원수만큼만 먹을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
삼남도 함께 아파해주고 눈물 흘려주는 사람들로
이미 배가 불렀다.
북한산 자락 아래 적어도 50년은 되었을 양옥집.
삼남이 사람들 앞에 나선 두번째 모임 장소였다.
“우리 쌈남이, 괜찮어? 내가 아주 깜짝 놀래버렸잖여.
쌈남이, 예전엔 을마나 강해 보였다고.
애들 다 휘어잡고, 카리스마 '오' 였잖여…
나는 고것이 참말로 부러웠는디~.”
충청도 사투리 섞인 순애의 말에,
모임 자리가 웃음바다가 됐다.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힘,
순애는 공간의 공기를 바꾸는 마법사 같았다.
퇴근 후에도 늘 수업 준비를 하던 열정가.
순애와 학년을 함께했던 그 해는 희극 자체였다.
“으구, 우리 쌈남이.
이런 일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만났지.
이럴 땐 만나서 얘기를 해야 맴이 풀어지는 법이여.”
'천여사'라 불리우는 정미는
모이기만 하면 번호표를 뽑아야할 정도로
말 많고, 시끄러운 회원들이 편히 얘기하도록
항상 자신의 집을 내주었다.
정미네 집은 높이 솟은 아파트보다 더 높은 동네에 있었다.
정미는 이 집에 들어올 때, 받은 견적이
몇 천만 원은 되었다고 했다.
부지런한 황금 손, 정미는 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하나 직접 수리했다.
보일러를 고치고, 도배와 장판, 문을 바꾸고
마당을 갈아 텃밭을 꾸미고,
수국과 장미, 맥문동, 비비추... 마당 한쪽을 식물원처럼 만들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만큼 사람에 대한 정도 남다른 그녀였다.
삼남의 소식을 들은 정미는 긴급 모임을 소집하고,
아직 철이 아닌 비싼 과일로 한가득 테이블을 차렸다.
"어머~ 너무 이쁘다. 나 이런 집에 살고 싶어."
대문을 연 영자가 흐드러지게 핀 수국에 감탄한다.
곧 퇴직을 앞둔 영자는 여전히 학교에서
부장을 도맡아 하는
모임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에고 에고, 피곤하다. 피곤해.
차가 많이 막히네..."
차를 지하에 밀어 넣은 특수교사 혜숙.
요즘도 뭘 배우러 다닌다고 분주했다.
무슨 새로운 행동중재 교수법이라나?
이미 전문가인데, 더 전문가가 되겠다고 바빴다.
쌈남이...
밖에서 누가 이름을 크게 부르는 걸 싫어하던 삼남이지만,
언니들이 불러주는 ‘쌈남이’에는 정이 묻어 있었다.
삼남을 아껴주는 따뜻함에 말랐던 울음이 또 터졌다.
“그냥… 너무 바보 같아서, 아무도 못 만나겠더라고요.”
“바보라니, 그게 왜 바보여.
열심히 하는 교사를 병들게 만든 이 사회가 바보지.”
순애 언니의 말투엔 춤을 추는 듯 리듬감이 있다.
그 리듬감으로 순애는 항상
상황을 단순화시켰다.
“자꾸 반성하지 말구, 흘려보내애.
싹 잊어버려. 왜 쌈남이가 힘들어야 돼애?”
"그르치, 잊어버려. 우리 수내 킴 봐. 어제 일도 싹 잊잖아~"
천여사와 수내 킴. 둘의 쿵짝은 서수남, 하청일 저리 가라였다.
다시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가 삼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했다.
“아이구, 옛날이 좋았지. 예전엔 교사야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힘들 것도 없다 생각했었는데. 이젠 진짜 힘드네. 후배들만 안쓰럽지...”
내년에 퇴직하면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영자 언니였다.
남들이라면 하루빨리 퇴직하고 싶을 것 같은데,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천상 교사였다.
"삼남샘도 감당 못했다는 게 중요한 거 같아.
이건 진짜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특수학생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사랑 많은 혜숙.
희생을 마다않는 그녀의 아이들을 위한 손길엔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들은,
비난하는 대신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각자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달려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었다.
돌아오는 길,
삼남은 생각했다.
교사의 삶은 결국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란 걸.
이렇게 서로를 불러내고,
‘괜찮다’ 말해주는 순간이 모여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긴다는 걸.
어느 날 날아온 한 권의 책, 케이크와 커피,
접시에 수북히 쌓인 고기와 풍성한 식탁의 환대,
웃음기 머금은 위로와 수다...
삼남은 자신이 새삼 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좋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