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화.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무너졌던 마음의 흙더미 아래에서 초록 싹 하나

by 마음리본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하게 재구성된 허구이며,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창밖에 새소리가 들렸다.

저 놈의 새가, 또 나를 깨우는군.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우는 그 소리가

삼남을 깨우는 것 같아 듣기 싫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눈을 떴을 때, 심장소리는 고요하고 새소리는 경쾌했다.

“일어나 볼까…”

입안에서만 뱅뱅 돌던 말이 처음으로

실제 말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창문을 열었다.

쌓인 먼지가 바람에 날렸다.


찬 기운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상하게도, 그 공기가 반가웠다.

나 아직 살아 있구나…

그렇게 느껴졌다.


“이불 빨래나 해야지.”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불을 걷어 세탁기에 넣었다.


간단히 밥을 지었다.

현미에 콩 조금, 된장국엔 멸치 국물, 애호박 한 조각.

설거지를 마친 손으로 커피를 내렸다.

그 향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삼남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책 한 권을 펼쳤다.


‘나, 지금 책을 읽고 있어…’


책의 줄거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게 좋았다.

책을 읽고 있다는 그 자체가 내가 돌아오는 신호 같았다.

블로그를 켰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잠가둔 비공개 일기장.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울증일 때 나는,

한없이 부정적인 생각에 잠긴다.

내 머릿속은 계속 나를 망했다고 말하고,

내 몸은 느려지고,

아무 한 일도 없이

잠깐 생각에 잠겼는데

시간이 훅 지나가 있다.

하지만 오늘,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빨았다.

설거지를 하고, 책을 폈다.

오늘, 조금 나아진 것 같다. 감사하다.”


딸깍.

‘저장’ 버튼을 누르면서

삼남은 아주 작은 숨을 쉬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대학 기숙사에 간 둘째 아들이 주말에 다녀간다던 게 생각났다.

그 생각이 따뜻했다. 보고 싶었다.


그날, 삼남은 알았다.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걸.

무너졌던 마음의 흙더미 아래에서 초록 싹 하나가,
힘차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시간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올해 막 대학생이 된 효민이가 오랜만에 집에 왔다.

동아리와 과 엠티로 몇 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엄마, 나 왔어."

효민이는 큰 아들보다 애교가 많고 살가웠다.

"아들 왔어?"

"엄마, 괜찮지? 괜찮아질 거야."

효민이는 삼남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넸다.

무뚝뚝하면서도 살가운, 말보다 진한 위로...

"안 괜찮아. 근데 괜찮아질 거야."

효민은 여전히 엄마의 등을 토닥이다가 대뜸 말했다.

"응, 이제 괜찮아.

근데 나 배고파. 밥 있어?"

요즘 한참 벌크업 중이라더니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프나 보다.


삼남은 효민이 주말에 온다는 소식에

모처럼 장을 봤다.

고기를 사고, 김밥 재료를 사고...

고기와 김밥, 효민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방금 전까지, 삼남은 최근 한 달 중 가장 바빴다.

계란을 부치고, 햄을 굵게 썰고,

어묵을 볶고, 당근을 채 썰었다.

불고기를 볶고,

엄마가 준 참기름으로

엄마의 밭에서 딴 시금치를 무쳤다.

고기김밥, 치즈김밥, 참치김밥... 버전도 여러 가지로 준비했다.


김밥은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삼남은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 시절

바쁜 아침에 빨리 몇 개 집어먹고 가도록

김밥을 자주 싸곤 했다.

삼남의 엄마처럼,

따뜻한 곰국에 각종 나물 반찬은 못 하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편이 식탁에 앉으며 푸념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효민아, 너는 좋겠다. 엄마가 너 주려고,

이렇게나 많이 준비했네.

아빠는 밥도 못 얻어먹었는데."


"그랬어? 아빠는 할머니가 있잖아. 그리고, 엄마가 힘드니까 이제 아빠가 하면 되지."


"그러네. 아빠가 잘못했네.

효민아, 이거 한번 먹어 봐"


남편이 멸치볶음을 효민이 입에 넣어준다.


"으악, 짜. 이거 뭐야. 물로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엄마가 글쎄, 설탕인 줄 알고, 소금을 들이부었지 뭐야.

아무리 설탕을 넣어도 계속 짜더래.

웃기지? 엄마가 우울증이 맞긴 한 것 같지?"


"뭐야? 왜 소곤대? 다 들리는데?

이거 아직 완성이 아니라니까, 왜 꺼냈어?"


효민이와 남편이 함께 웃는다.


썰렁하던 식탁이 풍성해지고,

집안에 온기가 돌았다.

김밥을 다람쥐처럼 오물거리며 잘 먹는 효민이를 보니

삼남의 마음에 봄이 온 듯했다.


"자식은 다 커도 어매가 있어야 써.
애기들이 한번썩 오믄은 땃땃한 밥 해줘야 씅께."


순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도 니 아들 밥 묵는 거 보믄 좋지야.
나도 그래야."

엄마...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제일 좋다는 엄마,

삼남도 그런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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