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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우리 엄마는 코미디언

by 마음리본

오남매를 홀로 키운 엄마는

힘들고 어렵던 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 얘기를 해 보려 한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 없이 자랐어도

그늘졌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무슨 부잣집에서 곱게 자랐냐는 말까지 들었다.

남동생이 연애할 때, 올케는 부잣집 도련님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건 다 엄마의 긍정과 밝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했지만 우울한 날보다 즐거운 날이 훨씬 많았으니...


오남매가 한 방에서 자던 시절,

(우리 집은 방이 2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엄마 포함 6명이 안방에서 다 같이 잤다.)

직사각형 모양의 안방 문 앞에 엄마가,

그 옆엔 남동생, 나, 오빠, 작은언니, 큰언니 순서대로

반원 모양으로 함께 이불을 덮고 잤다.

엄마 옆은 항상 막내, 막둥이 차지였다.


추운 겨울, 슬레이트 지붕과 얇은 시멘트 벽인 옛날 집은 웃풍이 심했다.

무겁디 무거운 목화솜 이불을 덮고, 다같이 잠이 든 어느 겨울밤.


엄마가 속이 안 좋았던지 크게 방귀를 뀌고선

"아따, 맛있구만."

이라고 농담을 했다.

잠결에 이 말을 들은 작은 언니가

"나도 줘."

했다.

자기만 빼고 뭘 먹는 줄 알았나 보다.

엄마는 한 술 더 떠

"쪼깐 기다려봐라잉, 또 나온다."

엄마는 곧이어 방안을 울리는 서라운드 방귀를 꼈다.

그리고 이불을 들어올려 냄새가 빠져나가도록 털기 시작했다.

"오매, 냄시여. 누가 똥쌌는갑네."

자다 깬 오빠가 코를 싸쥐었다.

그 날 우리는 칼바람이 부는 엄동설한에 창문을 열고

휘.휘. 한참 이불을 턴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가난한 시절, 우리 집에서 기념일은 남의 얘기였다.

어린이날도 크리스마스에도 선물을 받거나 여행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딱 한 번,

초등학교 때 전라도 광주에 패밀리랜드라는 곳이 처음 오픈했던 해.

엄마와 가족들이 다함께 그 곳에 갔다.

시골 촌년이 광주도 신기한데, 놀이동산이라니...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사람에 밣히는 줄 알았다.

어디 앉을 데도 마땅치 않았고, 놀이기구 한 번 타기가 어려웠다.

모처럼의 외출에 그 때만 해도 젊었던 엄마가 멋을 냈었나 보다.

"오매, 힘든그."

넓은 놀이동산을 뾰족구두를 신고 걷다가

폭삭 주저앉아버린 엄마.

어찌나 발이 아팠는지, 구두를 벗어버리고

맨발로 아스팔트를 돌아다니던 엄마가 생각난다.

(놀러도 가 본 사람이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잘 노는 법이다.)

하지만 엄마는 뾰족 구두 따위에 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환경과 상황에 적응할 뿐 아니라, 개척해내는 사람...

그 날 우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도 싸온 김밥을 맛나게 먹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가족들이 처음으로 강원도 양양으로 여름 휴가라는 걸 갔다.

초등학교 때, 영암의 도갑사 계곡에 간 이후로

거의 처음이었다.

고 3인 남동생을 빼고,

당시 직장을 다녔던 언니들과 군대 간 오빠, 나까지

엄마와 함께 오랫만의 가족여행이었다.

운전하는 사람이 없었던 우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속초에 가서 설악산과 낙산 해수욕장을

시내버스로 돌았다.

여행 보따리를 들고, 시내버스를 여러번 갈아탔던 기억이 난다.

-한 끼도 사먹지 않으려고

영암에서부터 이고 온 솥단지 가득 찰밥을 들고...)


1박 2일의 짧은 일정에 에피소드도 많았다.

오빠는 설악산에서 군번줄을 잃어버려

엄마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군인이 군번줄을 아무데나 노믄 쓰겄냐.

예끼순, 이 모지란 X아."

큰언니가 예약한 숙소는 낙산 해수욕장에서 너무 멀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했던 숙소에 도착하자

엄마는

"으디 이라고 뭔 디가 있다냐?

멀어서 바다도 못 보고 쓰겄냐?

나는 여그서 안 잘란다. 예끼순."

그 때만 해도 엄마가 젊어선지 기운이 남아돌았나 부다.

쩌렁쩌렁 기운 넘치게 큰 언니에게 화내는 엄마 덕분에

펜션 주인은 돈을 환불해 주었다.

우리는 여행 보따리를 메고, 도로 버스를 타고 가

낙산 해수욕장 1분 거리 민박집에 묵게 되었다.

실컷 해수욕 후 바로 들어와 샤워할 수 있는 장소.

엄마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극성수기 낙산해수욕장 코 앞

겨우 구한 허름한 한옥 민박집 방 한 칸에,

공동 부엌과 공동 샤워장이었던 건 비밀이다-



다음 날 새벽 5시, 어스름 동이 트기 전

모처럼 가족끼리 거나하게 삼겹살 파티 후

한참 꿀잠에 빠져있을 때,

엄마는 불을 켜고, 우리들을 깨웠다.

"자러 왔냐? 여그까지 자러 왔는갑네.

언능 인나라. 해 보러 가게."

엄마의 까랑까랑한 사투리 소리에

옆방 사람들까지 잠이 깰 정도였다.

엄마 덕분에 깜깜함을 헤치고 걸어 올라

낙산사에서 본 일출은

그 이후 내가 살아오면서 본 일출을 통틀어

가장 멋진 장관이었다.

한여름 주위를 새빠알갛게 물들이며

올라오던 커다랗고 붉은 해에 모두가 함께 감동했었다.

"해가 이라고 올라와.

혓바닥같이 쏘옥 내밀드라고."

혀를 조금씩 내밀며 떠오르는 해를 표현하던 엄마.

당시 전라도 영암에서 50년을 사셨기에

강원도에서 일출을 본 적이 없었던 엄마에게

그 장면은 너무도 색다른 경험이었으리라.


일출 표현도 익살스러운 엄마는,

나에겐 모습만으로도 항상 웃음을 주는

영원한 코미디언이다.


아래 사진은 그 때가 그리워

2022년 세 딸들과 함께 간

설악산 오색약수 계곡과 낙산 해수욕장 사진입니다.

언니의 선글라스를 한 번 껴 보겠다고 쓰고 찍은 사진,

엄마는 "모지란 엄마를 머다러 찍냐"고 하지만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엄마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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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오색약수 개울가에서, 막내딸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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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싫은 김성님 여사(좌), 이제는 지팡이 없이 못걷는 엄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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