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짐 오시요."
엄마의 텃밭은 주인이 따로 있다.
바로 옆 수백 평의 넓은 땅에 포도밭을 하는 아저씨다.
엄마는 십여 년의 텃밭 이동 살이 끝에 이곳에 정착했다.
포도밭 아저씨가 물도 사용하게 해 주고, 전기도 쓰게 해 주었단다.
"추석 때 묵게 포도 한 박스 담아주쑈."
엄마는 포도밭 비닐하우스 평상에 앉으며, 명령하듯 말씀하신다.
아니 명령보다는 호탕함, 당당함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서든 기가 죽지 않는다.
싸움은 기세라고 했던가?
관계도 기세인 것 같다.
떡방앗간을 오래 하셔선지 사람을 대할 때 두려움이나 낯가림이 없고,
열등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엄마의 무엇이 이렇게 당당하게 했을까?
도시에서 엄마보다 비싼 아파트에, 비싼 옷, 비싼 차, 많은 돈을 가지고도
우리 엄마만큼 당당함과 자신감을 갖고 사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그건 아마 엄마가 살아온 세월,
80여생을 살아오며 경험한 자기 확신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일하시는 분이 포도를 상자가 아닌
커다란 바구니(이사 갈 때 차곡차곡 쌓는 큰 바구니)에 가득 담는다.
"얼마요?"
"3만 원만 주셔요."
10만 원도 넘을 양을 3만 원이란다.
"이렇게나 많이 주세요?"
나는 깜짝 놀라 감사인사를 한다.
포도밭 주인 아저씨는 바구니를 차에 실어주며 말씀하신다.
"내가 어머니한테 빚을 졌으니, 갚아야죠. 어머니가 맨날 김치 담아다 갖다 주시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포도밭 아저씨 아내가
암으로 고생하여
작년 김장할 때 김치를 못 담았단다.
그런데 엄마가 큰 김장통으로 김치를 한가득 꽉꽉 눌러 담아 주셨다고 한다.
"어머님한테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포도를 드리면 자꾸 다른 걸 챙겨주셔요."
엄마는 동네에서도 인싸다.
엄마와 함께 아파트 입구나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를 건넨다.
아마 엄마의 고추나, 오이, 가지, 감자, 고구마 줄기 정도는 한번씩
맛보았을 이웃들이다.
아파트 노인정에서 점심 알바를 하는 엄마는
알바비보다 텃밭 채소값이 더 나갈 듯 싶을 정도로 자신이 수확한 야채로
노인정 점심 요리를 한다.
심지어 집에 있는 엄마표 된장, 고추장까지
다 가져갔다가 같이 사는 며느리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손도 크고,
퍼주기 좋아하는 동네 인싸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우리 집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이었다.
일찍 과부가 된 엄마는 사람들이 집에 오는 걸 좋아했다.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복날이면, 마당 한쪽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때고 닭을 대여섯 마리씩 삶아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나눠먹곤 했다.
나는 엄마들이 수다를 떨 동안
동네 또래 친구들과
돌멩이를 주워 공기놀이를 하다가,
소꿉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놀았다.
동짓날에는 다 함께 모여 찹쌀로 새알심을 동그랗게 빚어 넣은
팥죽을 한 그릇씩 먹었다.
인심 좋고, 손 크기로는 동네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엄마의 팥죽은
동네방네 후하게 인심을 쓰고도,
며칠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옛날의 우리 집은 푸세식 화장실을 가기 전
꼭 돼지우리를 지나야 했다.
안 그래도 화장실 가기가 무서운데
화장실을 지나치려면
그놈의 까만 돼지가 우리 밖으로 짧은 두 다리를 올린 채
밖으로 뜅겨나올 듯한 자세로 꿀꿀거렸다.
반갑다는 건지, 먹을 걸 달라는 건지
커다란 코를 킁킁커리는 돼지가
아직 아이였던 나는 무섭기만 했다.
그 까망 돼지가 어느 날,
불쌍하게도 사람들의 손에 잡아먹히게 됐다. 어쩐지 돼지가 너무 크더라 했다.
무슨 잔칫날이었을 것이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집에서 매일 보던 돼지가
동네 사람들 손에 죽을 때,
온 동네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돼지 멱따는 소리에 신이 나서 웃었지만,
나는 무섭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마당 한쪽에 귀를 막고 웅크리고 있었다.
동네 남자 아이들이 돼지 오줌보를
축구공처럼 이리 차고, 저리 차면서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아, 놔! 완전 옛날 사람 같네. 저 그렇게 옛날 사람 아닙니다)
방금 전 죽은 돼지와 남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그 장면은 어린 나의 마음에
삶도 죽음도 별 것 아니라는
삶이 희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날, 온 동네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좁은 우리 집 마당과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은 돼지 수육의 넉넉한 인심 사이...
수육을 썰며 호탕히 웃고 있는 우리 엄마가 있었다.
55세에 도시로 올라온 후에도
엄마의 인심은 변하지 않았다.
온 동네 사람들을 마당으로 불러들이진 못하지만,
친한 한글학교 할머니들을 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이고,
수영장 할머니들 대장 노릇을 하며,
함께 김장을 담그고 김장을 한 통씩 담아가게 했다.
엄마보다 훠얼씬 부자라는 아랫집 할머니는
명품 옷을 걸치고 엄마네 집에서 밥을 먹었다.
엄마는 그 할머니가 참 불쌍하다고 했다.
자식들 다 혼인시키고, 돈도 많은 할머니 뭐가 불쌍하냐니
류마티스 관절염인데, 혼자 밥 먹해먹기 힘드니 불쌍하단다.
인싸인 엄마는 오늘도 바쁘다.
이 할머니도 챙겨줘야 하고, 노인정 할머니들도 챙겨줘야 하고
엄마한테 잘한다는 다른 동생 할머니도 챙겨줘야 하고...
오남매 자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샘솟을까? 맨날 아프다면서?
엄마의 마음엔 아마 퍼줘야 다시 샘솟는 우물이 있나보다.
비워야 차오르는 달처럼,
퍼내야 맑아지는 샘물처럼
엄마는 마음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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