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가 울었고요, 아이가 달래줬어요

건강한 거리감이 우리를 지킨다

by 잔디

감정은 감각을 통해 깨워지고, 하나의 주기로 순환한다. 개인의 행동으로 감정에 접촉한다면, 감정은 건강하게 표출된다. 그 접촉이 막히면, 감정은 멈춘 채 쌓인다. 쌓여가는 그 감정은, 어느새 큰 문제가 되어 나를 덮친다. 나는 그 순간을, 뼈저리게 느꼈다.


“선생님, 울지 마세요.”


아이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방울 방울 흘렸다. 책상 위엔 우리가 방금까지 하던 보드게임 카드와, 아이를 위해 준비한 휴지가 있었다. 아이는 그 휴지를 집어들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휴지로 대충 닦았다. 축축해진 휴지를 쥔 손은 무거워졌다. 이런 순간이 반복되질 않길 바랐다. 이 장면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 10시, 평소처럼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그때 전화가 한 통 울렸다. 바로 받았지만, 얼굴은 어두워졌다. 전화의 대상이 썩 반갑지 않았다, 관리자의 부름은 늘 불편하다. 나는 그렇게 느릿느릿 목적지로 향했다. 3시간 같던 30분이 지나고, 다시 상담실로 돌아가 쓰러지듯 누웠다. 위가 쓰라리고, 머리는 무거워서 둔해졌다. 속이 안 좋아 점심도 걸렀다.


문제는 그날 오후에 상담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으려 심호흡하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울렁거리고, 마음은 어지럽게 흔들렸다. 결국 나는 준비되지 못한 채 아이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 40분 중 꽤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마주쳤다. 아이의 큰 눈망울엔 슬픔과 억울함, 외로움이 점점 번지고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 내가 비쳐졌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둑이 무너졌다. 결국, 아이는 흐를 뻔한 눈물을 감춘 채, 나를 위로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면 <아이의 슬픔에 공감해 함께 우는 따뜻한 장면>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이의 감정은 아이의 감정이고, 아이의 눈물을 내가 대신 흘릴 수 없다. 오히려 아이는 자신이 눈물을 흘릴 기회를 잃게 된다. 자신 대신 더 여린 존재에게 양보하게 된다. 한 마디로, 아이의 울타리 안에 들어있던 건강한 어른이, 갑자기 어린 동생이 되는 격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객관성은 적당한 거리감에서 온다. 거리가 있어야 내 감정과 아이의 감정을 구분할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아이의 감정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너무 떨어지면 아이의 감정을 놓쳐버린다. 나는 그날,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이의 감정을 내 것처럼 받아들였고, 미해결된 감정이 올라왔다. 결국 아이 대신 내가 울어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감정 조절의 실패가 아니다. 첫 문장을 기억하는가? 감정은 감각을 통해 알아차리고, 행동과 접촉으로 풀리면 사라진다. 그 순환 주기가 멈춰있으면, 그 감정은 불청객이 된다. 자신이 해소될 때까지, 불쑥불쑥 찾아온다.



게슈탈트 이론의 <알아차림 접촉 주기>


미해결된 감정은 나와 아이의 경계를 흐렸다. 건강한 거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상황을 막으려면 먼저 내 감정에 접촉했어야 했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요즘 나는 싱잉볼 명상을 즐긴다. 마음이 소란스러우면, 싱잉볼 진동에 집중한다. 마음을 비우고, 나의 감정에 접촉해있으면, 감정은 만족하며 사라진다. 요지는, 나는 이제 날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먼저 나를 지키고 돌봐야 한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은 요즘 마음에 제대로 화답하고 있는가? 아니면 꾹꾹 눌러담은 채 살고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나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 부디, 당신과 당신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