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모르는 척 찍은 사진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

by 버티기




성호는 서울에 있는 친정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주말에 집에 내려오던 아들의 머리카락 색은 늘 낯설게 바뀌어 있었다. 어느 날은 연한 갈색으로, 어느 날은 노란색으로. 마치 그동안 억눌려온 시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아이는 온몸으로 자유를 드러내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배시시 웃는 눈. 제법 멋을 부리며 젊음을 즐기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시렸다.


나는 그 마음을 감추려, 아이가 올 때마다 더 꽉 안고 등을 토닥였다. 현관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다녀왔습니다." 하며 들어온 성호는, 운동화를 벗으며 나와 똑 같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성호를 친정에 맡겨 둔 채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내 부탁을 좀처럼 거절하지 않던 아이였다. 힘들다는 말 대신, 괜찮다는 말을 먼저 하던 아이.

그 참을성 때문이었을까. 나는 더 쉽게, 더 오래 그 아이를 맡겨 둘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맡기는 것처럼.


‘너 키우느라 시들어 버린 네 동생 좀 살펴줄게.

이제 컸으니 잘 지내고 있으렴.

엄마가 자란 곳이니까.’


나는 아이가 내 미안한 마음과 상우의 아픔까지도 다 알아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성호를, 서울이라는 낯선 하늘 아래 혼자 두었다.


북적이는 식구들과 사촌들 틈에 섞여 있었지만, 그곳이 성호에게도 '집'이었을까.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안에 온전히 속해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외로움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성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이제 덜 외롭겠구나 싶었다.


성호는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제 용돈은 물론 데이트 비용까지 감당했다. 여자친구의 형편이 어렵다며, 자신의 것을 내어 상대의 빈자리를 채우는 쪽은 늘 성호였다. 성호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의 고단한 연애는 오래 이어졌다.


그때 나는 몰랐다.

아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졸업여행을 앞두고,

성호가 무심히 꺼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행을 가는데 돈을 반반씩 내서 '공동 카메라'를 사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공동'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그 카메라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이 거칠어졌다.

왜 너만 그렇게 쏟아붓느냐고.


성호가 처음으로 내게 대들었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겠다는데, 왜 난리야!"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저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얼굴 같았다.


사랑이라기보다,

버텨내는 시간에 가까워 보였다.





어느 날,

우연히 성호의 고등학교 동창 어머니를 만났다.

그 집 딸은 성호의 학과 선배였다.

조심스럽게 꺼낸 말속에는 이미 학과 안에 퍼진 소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애써 모른 척했지만,

결국 그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고,

여자친구는 학과 선배와 사귀며 성호를 떠났다.

대학생활 내내 끌어오던 연애가 그렇게 끝났다.


"엄마, 마음이 너무 힘들어."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그런데 그 아픔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성호는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났다.


어느 날은 수제 초콜릿이,

어느 날은 쿠키가 예쁘게 포장되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너무 잘 보이려 애쓰던 그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내가 앞을 막아섰다.


“힘들 때 사람 만나는 거 아니야.

제대로 사람을 볼 힘도 없어. 안 돼!”


미안함과 불쌍함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 이 아이는 늘 고단한 사랑을 선택하게 되는 걸까.


어쩌면 성호는,

어디까지가 자기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인지

나누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경계를 한 번이라도 존중해 준 적이 있었던가.


질문은 부메랑이 되어 자꾸만 나를 향해 돌아왔다.



성호의 졸업식 날,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아들은 친구들과 웃으며 장난치고 있었지만,

그 웃음 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빛 속에

내가 알지 못했던 시간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밝은 엄마의 얼굴로 카메라를 들었다.


학교의 정문 앞에서,

아이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활짝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