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무의미, 정신의식의 추
사신은 눈이 하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신은 눈이 하나다. 어떤 망자에게 하나를 빼주고 남은 것이다. 그 하나의 눈은 마지노선이다. 더 이상은 안된다. 감정의 마지막 보루이자 보류다. 더 이상 내주면 사신의 기능은 정지되고 소멸된다.
인간이 가진 정신의식의 추는 옳고 그름 그 사이에서 움직이지만 사신이 가진 정신의식의 추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움직인다. 이것은 직업병이다.
망자를 인도할 때 옳고 그름을 따지면 눈알이 만개라도 부족하다. 망자들의 사연과 바람은 다 옳다.
사신은 망자에게서 의미를 찾는다.
어쩌면 그 의미는 사신에게도 구원이 될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가 사는 산의 계곡에서 시작되어 풍부한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이야기들은 서로 만나 합쳐져 바다로 귀결된다. 머나먼 여정이다. 인간들에게는 치유의 시간이다.
나는 눈알이 하나 남은 사신이다.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귀결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집단무의식이라는 방대한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 논리를 떠나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공유한다. 캐릭터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신인 나도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
망자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몸에 지닌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집착하고 그것을 절대로 버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망자들은 다 옳다. 그들의 말은 다 진실이고 거짓은 없다. 하지만 사신이 가진 정신의식의 추는 그들의 어떤 말에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건네준 목도리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내 정신의식의 추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것은 저에게 없는 듯 하네요.”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완벽한 조립품의 세계에서 하나의 불량품이 되어 용수철처럼 튕겨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눈이 하나 남은 사신이다.
하나 남은 눈알마저 이 망자에게 내놓으면 더 이상 사신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하나 남은 내 눈알을 망자를 위해 교환한다. 사신 자격 미달로 그 업무 또한 정지된다. 그렇게 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슬픈 감정과 우울을 먹는 자들이 그녀를 공격할 것이다.
인간의 슬픔에서 시작된 그들 역시 집단무의식 속에서 이야기들과 함께 기생한다. 사신이 의미를 찾고 소멸하는 그 순간을 노린다. 차가운 얼음을 깨고 올라온다.
교환이 이루어졌다. 나는 힘을 잃어간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간이동처럼 무대가 바뀌고 그녀와 나는 만년설의 호수 위에 서있다. 북부의 칼바람이 불어와 귀부터 찢어 놓는다. 바람소리는 괴물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탱크가 지나가도 깨지지 않을 얼음이 그녀의 발 밑에서부터 갈라지고 있다. 위태롭다.
그들은 그녀를 포함한 인간들의 슬픔과 우울을 먹고 자라왔다.
난 그녀를 지켜야 한다.
나의 간절한 바람은,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을 소환해 낸다.
망자와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하울이 힘든 전쟁 속에서 상처받다가 소피를 만났다. 하지만 하울은 나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 망자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공중산책을 하다가 날아온다.
센이 니기하야미 고하쿠누시, 강물의 신 하쿠의 이름을 알려준다. 하쿠가 깨어나 탈피를 하고 새로운 용으로 다시 태어나지만, 망자를 위해 먼저 날아온다.
잠만 자던 토토로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사츠키의 우산을 들고는 수직비상하고 포효와 함께 그녀를 위해 날아온다. 그녀가 살아생전 아들과 함께 보았던,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다.
그녀를 위해 모여든다.
갈라졌던 발 밑의 얼음이 깨졌다. 균형을 잃고 호수로 빠져드는 그녀의 앞, 유전이 터진 것처럼 시커먼 기름기둥이 솟구쳐 올라왔다. 우울을 먹는 자들이다.
하나가 아니다. 그녀를 중심으로 차례차례 솟구쳐 올라온 기름기둥은 방향을 틀어 그녀에게 달라붙고 심비오트처럼 끝내 집어삼킨다.
사신은 소멸하는 과정에서 간절히 빌고 또 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조연이다. 여기 그대들 앞에 불멸의 주인공이 있으니 그녀를 추앙하라!
하울이 날아와 망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름의 늪으로부터 그녀를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쿠가 기름기둥 사이를 날며 유인작전을 펼치고, 토토로가 기름기둥을 하나씩 먹어 삼켜 버린다. 그녀를 지켜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우울을 먹는 자들이다. 그녀의 우울이 사라지지 않으면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몸이 다 기름으로 뒤덮인 하쿠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추락한다. 하울이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도 기름이 올라 타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기름 속으로 그녀의 얼굴이 사라졌다.
이대로 끝인가.
나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이 세계를 통제한다.
만년설의 호수에서 시계탑이 위치한 장소, 그녀의 아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무대를 이동시킨다.
우울을 먹는 자들은 그녀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장소가 바뀌어도 빠져나오지 못하면 끝이다. 나도 이제 소멸한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아주 오래된, 부른 배에 입을 맞추는 남자의 모습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잘 들어.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너의 싸움을 대신해주지 않아.”
난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바로 그때다. 그녀가 내 말을 들었나 보다. 우울의 기름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온다. 이겨낸다. 그녀를 지배해 왔던 슬픈 감정과 우울이 사라지니 우울을 먹는 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목표로 할 수가 없다. 기름기둥이 하나 둘, 다시 얼음 밑으로 사라진다.
그녀의 승리다.
시간과 장소가 바뀌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사라지고 없다.
시계탑 아래 한 아이가 오르골의 태엽을 감는다. 인생의 회전목마가 오르골을 통해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대체할 수 있는 건 눈사람뿐이다. 사신의 마지막 힘으로 눈사람이 된 망자는 아들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꼬마야 안녕?”
눈사람 옆에 쭈그려 앉아 계속 태엽을 감던 작은 남자아이는 깜짝 놀라 두리번두리번 거리 더니 옆에 있던 커다란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나야. 내가 말하는 것 맞아. 꼬마는 어째서 자꾸만 오르골 태엽을 감고 있는 거야?”
잠시 놀란 듯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쭈그려 앉아 오르골만 바라보며 태엽을 감는 아이.
“엄마가 올까 봐... 엄마가 오르골이 끝나기 전에 온대. 근데 있잖아, 지금은 그냥... 안 왔으면 좋겠어.”
상처받은 아이의 투정을 마지막으로 사신은 소멸한다.
[00:00]
크리스마스 종이 울려 퍼진다. 사신의 힘은 여기까지다.
눈사람도 녹아내린다.
망자가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잘 자... 우리 아들. 또 만나.”
사신은 의미를 찾았지만 소멸된다.
그 의미는 세상 모든 이야기와 함께 강물처럼 흘러 바다가 될 것이다.
회중시계가 떨어져 아이의 발 앞, 녹아내리는 눈속에 파묻힌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