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31일 일요일 오후
2006년 12월 31일 일요일 오후 / 서울, 세영대 영화동아리방
“해인 선배! 세희 언니 내년에 필리핀 어학연수 간대요?”
“지난주에 잠깐 이야기하더라. 한두 달 정도 다녀온다던데?”
“봐요, 제 말이 맞죠? 언니 거기서 계속 있을 예정이래요.”
“아…”
“아는 무슨요! 세희 언니 씨앗학교에서 논술 강사 알바했잖아요. 그 학교 자매결연하는 필리핀 학교에서 강사 구하나 봐요.”
“세희 집에는 내려갔어?”
“3일에 간다던데요? 언니는 꼭 선배한테만 말 안 하더라니까요. 불쌍한 어린양이여.”
“또 그 얘기야?”
“그 불쌍한 어린양한테 까인 제가 더 불쌍하죠.”
“너는 정말…”
“둘은 도대체 무슨 사이예요? 언니 가고 나서 눈물 콧물이나 흘리지 말아요.”
“뭐야? 지인아, 너 알고 있었어?”
“저기요, 존경하는 선배님. 눈치 더럽게 없는 대해태 멤버 빼고 원투 전부 다 알걸요?”
“언제부터?”
“원투 모임 첫날부터요. 그래도 본인 마음이라도 알고 계셔서 다행이에요. 저는 선배도 모르시는 줄 알았어요.”
“혹시 세희도 알아?”
“선배님, 다시 말씀드릴게요. 대해태 멤버 빼고는 다 압니다. 그럼 전 마무리 작업하러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인은 시나리오를 정리해 가방에 넣으며 동아리방을 나서려 했다.
세희가 해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지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해인을 짝사랑해 왔다.
그리고 세희는, 자신을 향한 해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괜스레 그를 피했다.
지인 또한 해인이 세희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주의 고백은, 해인이 거절할 걸 알면서도 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을 놓고 싶었던 것이다.
문을 나서려던 지인을 해인이 불렀다.
“지인아, 세희 평소랑 다른 점 없었어?”
“별다른 건 없었어요. 짐 정리하느라 바쁘다길래 그냥 그러려니 했죠.”
“그래?”
“왜요? 선배, 혹시 세희 언니한테 고백이라도 하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유서를 쓰고 있어서.”
“아, 그거요? 세희 언니가 유서 하루이틀 쓰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 틈만 나면 유서 쓰는 거.”
“원투 회원들이 세희 언니 뭐라 부르는 줄 아세요? ‘유서장인’이요. 여주인공들을 죄다 죽여버려. 죽일 때마다 유서를 얼마나 구구절절 쓰는지 몰라요.”
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방 속에서 시나리오 한 편을 꺼냈다.
세희가 쓴 「너의 시간으로 내가 갈게」.
그녀는 마지막 장을 펼쳐 한동안 눈길을 멈췄다.
“살리자고 했더니, 또 수정해서 죽였네. 이번에도 결국 죽였어.”
“시나리오 최종본은 세희가 어떻게 하기로 했지?”
“언니가 집 내려가기 전에 동방에 전달하고 간다고 했어요.”
“내일 오전까지로 제출일 바뀐 건 세희도 알지?”
“언니가 가끔 사라지긴 해도 시나리오 펑크 낸 적은 없어요. 걱정 마세요.”
지인은 이틀 전 세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동방에 못 오게 되면 집에 들러 달라고 했다.
현관 선반 위 서류봉투를 태영 선배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럼 제가 가는 길에 언니 집에 들러서 받아올게요.”
지인은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ㅡ신호만 이어졌다.
‘벌써 자나?’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 세희네 집 비밀번호를 다시 확인한다.
“선배, 저 세희 언니 집에 들러서 시나리오 최종본 챙겨올게요. 내일 오전까지 시간 맞춰 올게요.”
“지인아, 나도 같이 가자.”
가는 길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겨울 저녁, 창밖의 불빛이 스쳐 지나가며 차창에 흔들렸다.
지인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얹혀 있었다.
신성동역에 도착할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배, 그런데 갑자기 세희 언니 유서 이야기는 왜 하신 거예요?”
“그냥, 평소랑 좀 달라 보여서.”
“뭐가 달랐는데요?”
“대진이가 이번에 세희 유서집을 따로 묶었잖아. 근데 유서마다 날짜가 다 ‘지난 날’이더라고.”
“맞아요. 그런데요?”
“오늘 내가 본 건, 지난 날짜가 아니었어.”
“날짜가 언제였는데요?”
“2006년 12월 31일. …그러고 보니, 오늘이네.”
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띵동, 띵동ㅡ’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
지인은 세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집 안에서 미세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비밀번호를 누른다.
811013*. 띠리릭ㅡ
“선배가 먼저 들어가요.”
해인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코끝을 스치는 건, 씁쓸한 약 냄새였다.
현관을 돌아 들어가니 세희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해인은 침대 옆으로 달려가 쓰러진 세희를 끌어안았다.
“세희야! 한세희! 지인아, 119! 119!”
* 대해태 : 대진, 해인, 태영 3명의 약자 해태타이거즈 광팬
* 원투 : 세영대 영화동아리이름 10월 12일 창단되어 원오원투 줄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