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2006년 12월 31일 일요일 오후

by 노래하는쌤

2006년 12월 31일 일요일 오후 / 서울, 고대안남병원


“한세희 씨 보호자분?”


머뭇거리던 해인의 등을 지인이 살짝 떠밀었다.


“네… 네.”


“위세척과 응급조치를 진행했습니다. 현재 환자분 체중이 34kg입니다. 피검사 결과가 나와야 정확히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 두면 오늘 안으로 심정지가 올 수도 있습니다. 환자 본인조차 모르는 사이에요.”


“……”


“지난달에도 실신으로 응급실에 왔던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빈혈 수치가 매우 낮았고, 심박이 지나치게 느려 입원을 권유드렸는데 환자분이 강하게 거부하셨더군요. 보호자분은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일이 많아서 잠을 못 자서 그런 줄만 알았어요. 선생님, 그런데 왜 아직 안 깨어나는 거죠?”


“환자분이 스스로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장기간 영양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3개월 전부터는 수면제 용량도 늘려 처방받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보호자분이 옆에서 상주해 주세요. 의식이 돌아오면 바로 간호사실 호출 버튼을 눌러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지인은 병원 복도 끝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인 선배… 세희 언니, 잘못되면 어떡해요. 바보같이, 난 언니가 이렇게 아픈 줄도 몰랐어요. 저 두고 필리핀 간다고 투정만 부렸는데…”


“……”


“석현 오빠 떠나고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괜찮다고 하길래 정말 괜찮은 줄 알았어요. 괜찮을 리가 없는데… 다 제 잘못이에요.”


“지인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너는 더 늦기 전에 들어가.”


“알겠어요. 언니 깨어나면 바로 연락 주세요.”


“지인아, 다들 세희가 집에 내려간 줄 알고 있을 거야. 오늘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자. 태영이한테는 내가 따로 말할게.”


지인은 조심스레 가방 속에서 얇은 시집 한 권을 꺼냈다.

표지에는 희미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너의 시간으로 내가 갈게’

그 속에는 세희의 유서가 있었다.




세희의 꿈속.


“할머이, 내 심들다이. 할머이는 이래 살믄서 죽고 자플 때 없었능가?”


“죽고 자플 때가 왜 없었겄냐잉. 니기 애비 낳기 보름 전에 니기 핼애비 그래 가븟는디, 니기 애비 젖만 띠어블믄 니기 핼애비 맹키로마니 디져블라고 해븟단마다이.”


“......”


“세희야, 그런디...... 살믄 살아진당깨. 살믄 살아져야.”


“할머이, 내는 더는 심들어서 못 허겄다. 내는 인자 고만 할란다. 인자 할머이도 없고 내한티는 암도 없당깨. 만례씨 미안혀.”


“세희야, 내한티 암 껏도 남아븐것이 읍어서, 미련이 한나도 읍어갔고 시상 떠나블라켔는디 니가 왔단마다. 니도 혼자가 아니여야. 혼자가 아이랑깨. 얼렁 일나라. 세희 이 가스나야! 일나랑깨.”


“할머이, 미안혀.”


“여말이 빠진 소리 고만허고 얼렁 일나랑깨. 가스나야. 내 인생은 좆같았어도 니 인생은 꽃맹키로 살어라고 낸둥 말하디 안 한디? 살어란마다. 살어야쓴단마다 어여 일나랑깨!”




만례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 세희의 꿈에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어릴 적 세희는 병원에 다녀온 날이면 약기운에 잠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만례씨는 세희의 이마 위에 손을 얹고, 두 손을 포개어 조용히 기도했다.


그 기도소리는 언제나 눈물을 머금은 듯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오래도록 세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던 세희의 귓가에 누군가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해인의 목소리였다.

눈물을 머금은 채 낮게 떨리는 목소리.


세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그 순간, 해인의 손이 세희의 이마 위로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그의 다른 손은 세희의 가녀린 두 손을 모아 포갰다.


“세희의 아픈 마음을 만져주시고… 치유해 주세요. 상처받은 마음 회복시켜 주세요. 세희를 살려주세요. 제발… 세희 곁에 있는 사람이 제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살아만 있게 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살아요. 세희 없으면… 전 살 수가 없어요. 제발……”


그때, 세희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입술이 살짝 떨리며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인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오빠… 석현 오빠…”


해인의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세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나는… 세희야. 나 해인이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