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전하는 위로
쌀쌀한 겨울바람이 창문을 흔들던 아침, 노부인 은옥의 집은 유독 고요했다. 똑딱거리는 괘종시계 소리만이 넓은 거실을 채웠다. 그녀는 홀로 식탁에 앉아 식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먹었다. 수십 년간 온기를 나누던 맞은편의 텅 빈 의자가, 오늘따라 더 큰 구멍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 새벽빛을 가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영이 보였다. 옆집에 사는 젊은 배달원 정수였다. 늘 지쳐있고,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청년. 은옥은 저 청년의 텅 빈 방에도 자신과 같은 고독이 머물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닐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생각나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녀의 유일한 외출처인 '시간의 빵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사장님, 오늘 나온 빵 중에 가장 묵직하고 든든한 놈으로 주세요."
민서가 내민 따뜻한 식빵의 무게는, 단순히 빵의 무게가 아니었다. 텅 빈 집을 채워줄 삶의 묵직함이자, 위태로워 보이는 청년의 삶을 지탱해주고픈 든든한 마음의 무게였다.
같은 시각, 정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5층 계단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등은 땀으로 축축했고, 손에서는 스캐너의 차가운 감촉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일은 수많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지만, 단 하나의 문도 자신을 위해 열리지는 않았다. 세상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듯한 고립감. 텅 빈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저녁을 먹을 기력도 없이 차가운 방바닥에 무기력하게 누워버렸다.
바로 그때, ‘똑똑’ 하고 그의 방문이 울렸다.
짜증 섞인 얼굴로 문을 연 정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항의하는 고객이 아닌,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빵 봉투를 든 옆집 할머니 은옥이었다.
“어제 보니 영 힘이 없어 보이더군. 따뜻한 빵 먹고 기운 내게.”
떨리는 손으로 건네는 봉투. 그 꾸밈없는 말과 온기에 정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봉투에서 전해져 오는 묵직한 온기가 그의 얼어붙은 손을 녹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십 년 넘게 외면해온 기억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열일곱 살의 겨울,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집을 뛰쳐나가려던 순간. 무뚝뚝한 아버지는 말없이 뜨거운 군고구마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사과도, 변명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화해의 언어였다. 하지만 소년 정수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수는 지금 손에 들린 식빵 봉투의 무게와 온기가, 그날 자신이 거부했던 군고구마 봉투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빵을 받아 든 채, 십 년 넘게 가슴에 묻어두었던 후회와 그리움의 눈물을 터뜨렸다.
며칠 뒤 이른 새벽, 배달을 나가던 정수는 은옥의 집 문고리에 작은 봉투 하나를 조용히 걸어놓고 갔다. 봉투 안에는 그가 배달 중에 알게 된 시골 장터에서 사 온 따뜻한 약과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잠시 후, 문을 연 은옥은 약과 봉투를 발견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새벽빛 속으로 사라지는 정수의 배달 트럭을 보며, 그녀는 오랜만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묵직했던 고독의 무게와 고단함의 무게가, 이제는 서로가 나눠 들 수 있는 삶의 온기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