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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대상

by 은구


치매센터에서 오래 일한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런 센터는 어떻게들 알고 찾아가는지, 누가 모시고 거냐고 물으니 성별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남성인 경우 대부분 아내와, 여성인 경우 딸이나 며느리랑 온다고 했다. 좀 서글픈 이야기였다. 돌보는 법만 알지 받을 줄은 몰랐던 사람들과, 받을 줄만 알고 돌보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교집합이 뻥 뚫린 벤 다이어그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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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생각이 난다. 허리가 아파서 나이가 들수록 부엌일을 힘들어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매끼 고봉밥을 비울 정도로 식사량이 많은 할아버지의 밥을 챙기느라 많이 힘들어하셨다. 일찍이 혼자된 친구들에게서 은근히 속 긁는 말을 듣기도 했나 보다. 어떤 날은 밥 차리는 일의 고생스러움을 토로하면서 “아직도 영감 있는 건 내밖에 없다!”라고 한탄하기도 하셨다. 영감과 할머니에게 무슨 수가 있었을까. 할머니 머릿속에 영감이 있고 없는 경우의 수만 있었지, 스스로 밥을 차려먹는 영감의 존재 가능성은 없었다. 가족 3대 통틀어 아무에게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엔 아마 밥만큼이나 약을 훨씬 많이 드셨을 것이다. 원래 할아버지는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려 했는데, 집도한 병원에서 개복을 했다가 다시 닫았다. 종양이 너무 많이 전이되어서 여기서 치료하기 어려우니 대구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얼마 후에, 대구는 대규모 코로나 확진으로 인해 병원을 비롯한 도시 전체가 봉쇄되었다. 할아버지는 아무에게도 아프다던가 병원에 가야겠다는 말을 안 꺼내고 진통제만 잔뜩 타드시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뒤늦게 이런 상황을 알았을 때, 우리가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다. 매일 경보음이 울리는 문자를 받고 통장으로 지원금이 들어와도 ‘재난’을 정말 재난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재난이 가족을 휩쓸고 간 후에, 그러니까 결국 할아버지의 부재가 익숙해졌을 즈음에 할머니가 푸념했던 말이 기억났다. 이제 괜찮으시려나, 밥 차리는 고생은 좀 덜 하려나,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전혀 괜찮게 지내지 못했다. 마치 밥을 차리고 생활을 돌볼 일체의 의욕이 모두 사라진 사람 같았다. 반찬을 가져다 놓아도 상할 때까지 열어보지 않았고, 물 대신에 술을 마시고 빈 속을 앓았다. 평생 본인 능력 이상으로 남을 돌보는 데 익숙했지만 스스로를 돌보고 혼자 잘 지내는 법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마음(사랑, 믿음, 헌신, 이해와 같은)이라도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면 어느 한쪽이 침식되어 버린다. 할아버지가 전적으로 할머니에게 식생활을 의지함으로써, 할머니의 식생활을 전적으로 점유하기도 것이다. 오랜 시간 깎여나간 끝에 무너진 것들을 지금 와서 쌓아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또 어느 세월에?

안타까웠다. 할아버지한테 쌀 씻어서 전기밥솥 누르는 법이라도 알려드릴걸. 아니면 햇반 돌리는 법이라도 배우게 할걸. 할아버지가 스스로 밥을 차려먹었다면, 아마 할머니도 당신 자신만을 위해 밥을 차리는 것에 미리 익숙해졌을 텐데.


긴 설득 끝에 삼촌들이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처음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쓰셨지만, 이젠 그래도 잘 지내시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또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할머니의 일상에서 애써야 할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마찬가지로 마음 쓰이는 일 또한 없겠다는 쓸쓸한 생각도 든다. 병원에서 할머니를 잘 돌보고 있을지, 가끔씩 우려가 든다. 하지만 그보다도, 할머니 스스로가 자신을 돌보는 마음을 잘 갖고 있을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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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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