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단상들
마당 있는 집을 지어서 살고 싶다. 넓을 필요는 없고, 방 한 칸 정도 면적에 동글동글한 회색 자갈을 깔 것이다. 아침에 자갈의 색을 보고 비가 왔는지, 얼마나 왔는지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 지나가던 고양이가 들어온다면 자갈 밟는 소리가 날지 궁금하다. 마당에 고양이가 좋아하는 식물을 심어야겠다. 파피루스도 키우고 싶다. 부채처럼 펼쳐진 잎을 보며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편지를 상상해 볼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해가 뜨겠지. 햇빛이 눈을 너무 파고드는 건 싫다. 정동과 정서 방향에 난 창문에 수평 블라인드를, 남쪽으로 난 창문에는 수직 블라인드를 달 것이다. 일주운동에 따라 날개 각도를 조정하는 것에 열중하는 사소한 일상을 갖고 싶다.
실내 조명은 대부분 간접 조명일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영역을 만들고 싶다. 주방은 예외다. 내 손에서 무엇이 만들어지는지,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는지 스스로 잘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나의 집엔 의자가 많아야 한다. 높낮이와 푹신한 정도가 조금씩 다른 의자들을 발길 닿는 곳마다 둘 것이다. 손님을 초대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의자를 골라줄 것이다. 손길 닿는 곳마다는 책을 두어 작가들이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게 할 것이다. 멋진 책을 몇번이고 읽는 행위에 만성적으로 중독되었다. 삼년째 손자병법을 읽고 있다. 충분히 공격적이지 않은 나의 기세를 아쉬워하면서. 손자는 말한다. 전투에서, 반드시 살고자 하는 자는 사로잡히게 된다고. 나의 집념은 무엇일까. 이로 인해 나는 무엇에 사로잡히게 될까.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아직 배우지 못한 오래된 지식들을 따라잡고 싶다.
글감 하나 - 2022년, 아이폰 메모장에 쓴 일기
집에 가고 싶다. 근데, 내 집이 어디지?
서울에서 얻은 네번째 집. 여기서도 오래 살 계획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집의 정의가 혼란스러워졌다. 동네 친구도 없고 앞으로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 주민등록상의 거주지가 내 집이 맞나?
부모님이 몇 년 전 이사한, 내 고향과 같은 행정구역에 있지만 추억은 없는 집을 본가(本家)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언젠가 살고 싶은 공간을 마음속에 그리며 집이라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현재진행형 1인분 디아스포라.
글감 둘 - 2020년, 훈련소에 들어간 친구에게 쓴 인터넷 편지.
안녕.
나는 어제 이사를 했어. 하루가 너무 길더라. 고등학교 졸업한 후에 이사는 수도 없이 했는데 매번 점점 힘들고 싫어지는 것 같아.
이번에 이사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느꼈어.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데 큰 돈이 드는 계약서를 쓰니까. 계약서 쓴 날부터 이틀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
도덕시간이나 사회시간에 사람의 의무나 권리에 대해서 배우잖아. 너무 당연하거나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는데 이제 조금씩 알 것 같은 기분인거야.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너도 어쩌면 한동안 멀게 느껴졌던 의무를 다하느라 고생하고 있구나. 건강하고 안전하게 무사히 잘 있다가 나오면 놀러와. 감바스 할 줄 안다며. 내가 새우는 준비해놓을게.
잘 지내고 몸을 최대한 사리렴.
글감 셋 -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지혜의 일곱 기둥> 중에서
사람들은 내게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대에 대한 기념으로.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걸맞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집을 허물고 완성하지 않았으니.
이제 작은 파편들이 기어 나와 스스로 누추한 오두막을 기워 내고 있다.
당신이 준 선물이 드리운 일그러진 그림자 안에서.
맺는 말
글감을 찾아 메모장을 훑어보니 같은 주제에 대한 생각이 몇 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일기나 메모가 아닌 <글>이 주는 위안은, 쉼표도 찍지 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액자에 담을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표구사(表具師)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