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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접기

마음의 자전거

by 은구

다이소에서 이천 원을 쓰면 학종이 천장을 살 수 있다. 종이접기가 엄청 재밌지는 않다. 그냥 생각 없어지려고 하는 일이다. 마음 같아선 뜨개질을 하고 싶은데, 전에 배워보니까 재미는 있지만 방에 먼지가 점점 많아졌다. 미세한 섬유가 날아다녀서 눈이랑 코가 자꾸 가려워지길래 그만뒀다. 그림 그릴 때도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늘어나는 그림을 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고생한 게 아까워서 버리기도 곤란했다. 그리고 몇 년을 계속했더니 더 이상 그리고 싶은 게 없어져서 화방을 그만뒀다. 퍼즐도 좋아하긴 한다. 아주 작은 150 피스짜리 그림을 맞추면 2-3시간은 보낼 수 있다. 해체했다가 다시 할 수도 있으니까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개를 숙여야 해서 경추에 좋지 않다.

하여튼 뭐를 안 하고 못할 이유는 귀신같이 잘 찾는다. 그래도 종이접기를 안 할 핑계는 아직 찾지 못했다. 정방형 학종이로 내가 접을 줄 아는 건 딱 두 가지다. 학과 거북이. 둘 다 반복적이고 과정이 길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쁘게 잘 접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생각을 비우려고 접는 것이다.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접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접기도 한다. 테이블 위에 종이학과 거북이가 수십 개씩 쌓이면 꼭 무슨 장수를 기원하는 것 같아서 조금 웃기다.

crane.png 종이학, 출처: Diane Labombarbe / Getty Images


누군가는 컴퓨터를 마음의 자전거(a bicycle for our minds)라고 했다. 자전거로 적은 힘을 들여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생산도구이자 창작수단인 컴퓨터는 사람의 마음을 더 빠르게 먼 곳으로 갈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내가 맥북만 열면 길을 잃나 보다. 메일함과 폴더들과 유튜브 사이에서 헤맨다. 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에 비하면 종이접기, 뜨개질, 그림 그리기와 퍼즐 맞추기는 마치 실내자전거를 타는 것 같다. 갈 곳을 몰라도, 갈 곳이 없어도 계속 굴러야만 하는 마음을 위한 몸풀기 운동이다.


종이를 접다 보면 마음이 추억을 향해 굴러간다. 엄마 친구 중에 종이접기를 굉장히 잘하는 분이 있었다. 아줌마가 접은 모빌이나 백조는 어린이의 눈에도 대단했다. 우리는 다 같이 놀러 가서 종이접기를 배웠다. 거창한 수업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아줌마가 하시는 걸 옆에서 따라 했다. 아줌마는 수학도 엄청 잘하셨다. 그때 나를 괴롭게 했던 경시대회 문제들을 척척 풀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까지 해 주셨다. 수학 전공도 안 하고 대학도 안 간 주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신기하다고 했더니 엄마가 옛날에 여상에 똑똑한 애들 많이 갔다고,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고 그랬다.

아무튼 그때 아줌마네 집에 놀러 가면 수학 문제도 풀고, 종이접기도 하고, 간식으로 맛있는 배도 먹었다. 아줌마네 친정이 배농사를 하는 과수원이라서 제철이 되면 크고 시원한 배를 끝도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신기한 건, 내가 이렇게 추억을 많이 받아먹었으면서 아줌마의 이름은 모른다는 것이다. 아줌마의 말투, 즐겨 입으시던 옷, 취미나 특기 같은 것들을 잘 기억하기 때문에 사실 그 공백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종이를 접거나 배를 먹을 때 열에 한두 번 정도는 아줌마 생각이 나니까.


종이학과 거북이가 너무 많이 모이면 대충 과자 상자에 담아놓는다. 몇 달 전에 조카가 놀러 와서 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가방에 몇 움큼을 담아갔다. 아마 조카는 이모가 종이접기를 엄청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정정할 생각은 없다. 어린이가 마음속에서 그려낸 나라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꽤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이 것도 또 다른 ‘자전거’ 같다. 누군가의 추억이 되고, 그로 인해 내 자아는 더 먼 곳으로, 내가 직접 가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갈 수 있다.

조카가 또 놀러 울 걸 대비해서 새로운 동물을 배워서 만들어놓을까 싶다. 그러다 보면 동물원도 차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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