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가로운 아침에 밥을 먹으며 NHK 뉴스를 보고 있었다. 기후변화로 인해 일본 연안에서 잡히는 어종 분포가 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4대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 섬 후쿠오카현의 명산물인 복어가 올해에는 후쿠오카 해안에서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이제 복어가 어디에서 잡히나 봤더니,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 홋카이도에서까지 잡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막해하는 후쿠오카의 어민의 인터뷰 다음으로 나이가 지긋한 홋카이도 어부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갑자기 어종이 바뀌어서 당황스러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텐데, 담담한 말투로 "이제는 복어를 배워야지요" 라고 말했다. 그 말이 며칠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각별하게 다가온 적 없는 '배움에는 끝이 없다'라는 문장이 실체가 되어 귀를 때린 것이다. 나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라도 침착하게 새로운 배움을 준비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그런 시대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AI를 배우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여기저기서 강연, 책, 광고가 겁을 주고 달랜다. 그전에는 빅데이터였던 것 같고, 그전에는 메타버스였던 것 같고, 또 그전에는 4차 산업혁명(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이었던 것 같고, 그전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침착하지가 않다. 그 점이 못마땅해서 안 배우겠다고 굳이 외면하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매일 오징어 차지였던 낚싯바늘을 물고올라온 복어를 본 사람은 침착하기가 어려울 것도 같다.
예전에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자기 아는 분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데 걱정이 많다고 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부모님이랑 책 읽고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또래 애들과 노는 걸 시시해한다고, 그래서 학교를 가기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덧붙였다. 학교에 뭐 대단한 거 배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밥 먹고 싶을 때 못 먹고 화장실 가고 싶을 때 못 가는 거 배우러 가는 거지. 누군가는 ‘사회화’라고 간결하게 표현했을 말인데 너무 구체적으로 옳아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나는 지식이나 시험처럼 학교에서 ‘배우는’ 표면적인 것들에만 익숙했지, 밥 먹고 싶을 때 못 먹고 화장실 가고 싶을 때 못 가는 것에는 끝까지 익숙해지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그런 수모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먹고 싶은 시간에 먹고 싶은 것만 먹어야겠다는 막연한 고집을 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어떤 학습 목표를 세워야 할까. 무엇을 보고 들어야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던진 낚싯바늘을 물고올라오는 게 무엇이든, 호들갑을 떨지 않고, '이제는 복어를 배워야겠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