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우는 방법과 잘 우는 방법.
‘울지 마.’
어디서 어떤 이유에서건, 눈물이 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울지 마. 위로하는 말이 아니다. 그만 울라는 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울고 싶지 않을 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은 이유로 울었던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얼굴을 닦으면서 속으로 스스로를 다그치는 습관은 그때 시작되었다.
나는 눈물이 없는 편이다. 친구들은 결혼식에 갈 때마다 그렇게 눈물이 난다고 했다. 신랑 측 하객으로 가도 신부가 부모님께 인사를 하면 그렇게 눈물 버튼이 눌린다며. 사실 나는 언니가 결혼할 때도 전혀 울지 않았다. 축사를 읽는 아빠가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축가를 부르는 형부가 삑사리를 내면 어떡하나, 축의금이 잘 관리되고 있을까 같은 노파심만 들었다. 딱 한번 예외가 있긴 하다. 처음으로 학창 시절 친구의 결혼식에 갔을 때, 드레스를 입은 친구를 본 순간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흘러버린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볼 수 없어야 하는 것을 봐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눈물이 많기도 하다. 누군가 하는 얘기가 정말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게 느껴질 때면, 그게 슬픈 내용이든 기쁜 내용이든 눈물이 난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고, 나한테 말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 보다 시상식을 볼 때 훨씬 쉽게 운다. 이야기 속 눈물은 필연적인 것이라서 공감보다는 이해의 대상이 된다. 가끔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은 이야기 속의 맥락을 되짚어보거나 평가하느라 이야기 속의 인물과 함께 울 새가 없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상을 받아서 감격한 사람의 눈물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 불가피함은 화면 너머의 나에게도 전해져서 피하지 못하고 같이 우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좀 덜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상담센터를 찾은 적이 있다. 같은 이유로 자꾸 울지 않으려면, 날 불가피하게 울게 하는 것들을 이야기로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 이야기에 익숙해진다면 조금 덜 울고, 더 빨리 그칠 수 있겠다고. 그런 논리로, 울지 않고 말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상담을 시작했다.
몇 번째 상담이었을까, 상담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울 때 소리를 정말 하나도 안 내시네요.’ 그때도 나는 나를 울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속으로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되뇌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에 나는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남들은 울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나처럼 그만 울라고 다그치고 있을까? 한참을 곱씹다가 한 친구에게 어렵게 물어봤다. 울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친구는 ‘내가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상담 덕분인지, 친구와의 대화 덕분인지, 눈물을 이야기로 희석시키는 요령이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울면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버릇은 없어졌다. 그냥 열심히 울고, 어쩌다 그랬는지 나중에 되짚어 보고,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을 땐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또 절친한 친구가 새로 생긴다면 울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친구도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 같다. 생각은 나중에 하면 되니까, 울 때는 슬퍼하기만 하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