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맘때는 달리기에 빠져있었다. 친구들 사이에 소소하게 유행한 앱 때문이었다. 앱에 친구를 등록해 놓으면 내가 달리기를 할 때 친구들에게 알림이 간다. 알림을 받은 친구가 ‘응원하기’를 누르면 나에게 응원이 전달됐다. 응원을 알리는 효과음이 꼭 노래방 리모컨에서 ‘박수’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소리처럼 허접했다. 에어팟을 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열심히 달리다가 허접한 환호성과 어색한 기계음으로 읽은 친구의 닉네임이 연달아 들려오면 웃겨서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했다. 잘하지도 재밌지도 않은 달리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데에는 원격 러닝 크루의 응원이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했다.
사실 평생 달리기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몸 쓰는 건 다 못해서 달리기를 하면 매번 뒤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운동회보다 더 싫은 건 5월에 열리는 어린이 마라톤이었다. 학교에서 해마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개최하는 체육 행사였는데, 어린이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 같았다. 십 초만 견디면 되는 단거리 달리기에 비해, 마라톤은 늘어난 거리만큼 더 괴로웠다. 차라리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매번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운동장에 나가 쨍쨍한 봄 햇살을 맞으며 체조를 해야 했다. 운동장은 순환코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학년별로 코스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가장 긴 코스를 뛰는 6학년이 먼저 출발했다. 그다음 5학년, 4학년, 이렇게 시간차로 출발해서 전교생이 얼추 비슷한 시간대에 완주하게끔 계획한 것이다.
운동장을 벗어나 학교 부지를 끼고 돌아가면 가로수가 늘어선 언덕길이 나왔다. 그 무렵이면 나는 일찌감치 대열의 끄트머리로 밀려나서 발을 끌고 억지로 뛰고 있었다. 내리막길 아래에는 선캡을 쓴 어머니들이 흰 장갑을 낀 손을 흔들면서 물을 나눠줬다. 나는 힘이 없는 거지 목이 마른 건 아닌데도, 잠깐 쉬었다 가고 싶어서 일단 물을 마시러 갔다. 어머니들 중에 누가 나를 알아보고 힘내라고 하면 마신 물이 무색하게 속이 탔다. 울렁거리는 속을 삼키고 억지로 뛰고 있으면 어느새 등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나중에 출발한 학년의 선두 대열이 언덕을 넘어 경쾌하게 달려오는 것이다.
그 강렬했던 장면은 차츰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 대신에 그때 느낀 초조함, 정수리를 때리는 햇빛, 뒤늦게 밀려오는 갈증 같은 감각은 날카롭게 조각조각 남아있다. 가젤영양처럼 껑충껑충 뛰어온 선두 대열 주자들은 물도 마시지 않고 가볍게 나를 앞질러 갔다. 걷는 것만 못한 속도인데도 나는 애써 뛰는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마라톤 대회니까, 계속 달리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리 위에 걸린 해는 점점 뜨거워졌다. 혼자 뒤처진 것 같아 너무 부끄럽고 몸이 힘들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즈음 혜윤이라는 친구를 마주쳤다. 너무 마르고 창백해서 땀도 나지 않는 것 같은 친구였다. 낯을 가리는 나와 달리 혜윤이는 꼭 원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반가워했다. 계속 뛰면 힘들지 않냐며 같이 걷자는 혜윤이 덕에 나는 결국 뛰는 시늉을 멈췄다. 처음 본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자 남은 코스가 그리 버겁지 않았다. 운동장이 가까워질 무렵에 우리는 다시 조금 뛰는 척을 하고 길었던 오후를 끝냈다. 그 후로 마라톤 하는 날이 두렵지 않았다. 내 속도대로 가다 보면 어디선가 다시 친구를 마주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몇 달을 뛰어도 기록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달리는 시간도 좀처럼 수월해지지 않았다. 달릴 때 정수리 위에 해가 떠있으면 기억 속의 봄날이 떠올라서 컨디션이 떨어졌다. 그래서 가능하면 새벽이나 밤에 시간을 내서 달렸다. 그럼에도, 낮이건 밤이건, 달리기를 하면 오래된 추억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어폰에서 노래방 박수 소리가 들려오면 선캡을 쓴 어머니들이 흔드는 하얀 손이 아른거린다. 열정적인 기세를 뿜으며 앞서가는 러닝 크루를 보면 그때 언덕을 넘어오던 가젤영양 떼가 연상되고,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잠시 걸을 땐 얼굴이 창백했던 친구가 잘 지낼지 궁금해진다. 모두가 나의 러닝 크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