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리는 시간
오랜만에 축구를 보러 갔다. 축구장에 가면 들뜰 수밖에 없다. 설렌 얼굴을 하고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섞여 경기장을 향해 걷다 보면 북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내 심장도 북이 울리는 박자에 맞춰서 빨리 뛰는 것 같다. 나처럼 시큰둥한 사람은 가끔 이런 곳에 가줘야 한다.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를 파도를 어영부영 같이 타고, 누가 나눠준 스파클라를 얼떨결에 받아서 흔들고, 전광판에 잡히면 남들 따라서 열심히 손을 흔들고... 그렇게 순식간에 얼떨결에 이것저것 겪은 후에, 나중에는 어디랑 붙어서 이겼는지 어쨌는지도 다 까먹고 ‘진짜 재밌었다’는 감상만 남는다. 그래서 또 들뜨고 싶어서 간다.
화면 너머에서 구경할 땐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 해설자가 있다. 어느 팀이 상승세고, 이 팀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요목조목 짚어준다. 전술이니 포메이션이니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아듣는 척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경기장에 가면 쥐돌이 장난감에 홀린 고양이처럼 굴러가는 공을 쳐다보기만 한다. 지난 경험을 통해 결정적 순간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경기장에 가는 이유는 결국 강렬한 순간에 동참하기 위해서인데, 그 잠깐을 놓치면 전부를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중간중간 다른 생각이 들어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별 거 아니지만 희한한 사실이 하나 있다. 직관을 한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재미가 없다. 국에서 건더기만 건져낸 것 같다. 조마조마하면서 눈을 떼지 못했던 그 시간들이 ‘하이라이트’에 반영되지 않아서 그렇다.
직관을 가면 해설자 대신 옆에 앉은 아빠가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상대팀 골키퍼는 엄청 유명한 선수고, 지금 전광판에 광고 나오는 농산물 마트는 엄마가 맨날 장 보러 가는 데고, 저 선수는 아마 네 학교 후배일 거라고. 나는 대답한다. 나도 알아, 그래? 아마 그렇겠지. 역시 지역 연고팀을 응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선택일까. 포항 사람이니까 포항을 응원한다는 논리는 사실 좀 구식인 것 같다. 우리는 야만의 시기를 지나, 길고 지루한 농경사회를 지나, 다시 이겨야 살고 이기는 편에 서는 게 마땅한 사회로 회귀한 거 아니었나. 포항은 오래된 팀이지만 우승 후보로 꼽히는 팀은 아니다. 이기는 팀을 응원하면 더 좋을까? 아니면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게 좋을까? 응원석에 ‘축구는 전쟁이다 반드시 이겨라’라는 비장한 현수막이 걸려있다. 밑도 끝도 없이 ‘우리는 포항이다’라고 적힌 것도 있다.
선수들은 우리의 전폭적인 응원을 받는다. 경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선수들, 넓게 잡아도 코칭스태프와 구단 직원들까지인데, 그걸 자기 일처럼 여겨주는 사람들이 지금 14,000 명이나 있다. 좋겠다. 업무를 내 일처럼 여기는 게 도저히 안 되는 나로서는 이 근무 환경이 정말 부럽다. 그 14,000 명 중에 일을 쉬고 있는 나도 있다. 말이 쉬는 거지, 한동안은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시간의 규칙에도 무뎌질 무렵에 글방 모임을 시작하고, 포항 경기도 다시 챙겨보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았는데, 다행히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단위가 금방 다시 자리 잡았다. 기다려지는 이벤트가 있는 건 좋은 일이구나.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게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들을 모으고 모으면, 대략 ‘우리는 포항이다’로 요약이 되나 보다.
이번 경기에는 승자가 나오지 않았다. 전반에 한 골씩 주고받더니 후반이 되자 경기가 영 시원치 않아졌다. 무승부로 마무리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이전 몇 경기에서 쌓아놓은 승점이 있어서 팀 순위는 안정권이다. 대부분 재미없는 승리였다. 그런 경기는 하이라이트 영상도 재미가 없어서, ‘이렇게 꾸역꾸역 이겨서 뭐 하냐’는 식의 불만이 많이 달린다. 내용은 좋지만 이기지 못한 경기 vs 꾸역꾸역 이긴 재미없는 경기.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재미있는 경기지만 결국 시즌 후반에 팀을 강등 위기에서 지켜주는 것은 꾸역꾸역 쌓아놓은 승점이다. 역시 그런 건가. 꾸역꾸역 해야 하나. 나도 과거의 꾸역꾸역이 없었다면 지금같이 못 쉬었겠지. 국물도 없었겠지.
내 무의식은 뭘 봐도 자기 방식대로 해설을 하려 드는 습관이 있다. 축구의 하이라이트는 골인데, 인생에서 하이라이트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승리의 기준은 무엇일까. 모든 승리에 균일한 승점을 부여하는 게 타당한 걸까. 팀이 벌어놓은 승점처럼 나중에 내 삶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하나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공을 쫓아갈 마음도, 발 앞에 굴러온 공을 찰 기운도 다 떨어졌었나 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잠깐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필드를 이탈해서 관중석에 자리를 깔고 앉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지금 축구 보러 갔다가 머릿속에서 엉뚱한 생각만 굴리고 있다.
서울로 돌아오니 오랜만에 헤드헌터한테서 연락이 왔다. 꾸준히 연락을 돌리는 게 이 분의 일인 걸 알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동안 철저하게 잠수를 탔지만 염치 불고하고 답장을 했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인데, 내가 잠수했던 건 언급도 안 하신다. 더 감동이다. 통화가 끝나고 채용 공고 몇 개를 메일로 받았다. 이 중에 내 일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