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고향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그곳에 가려면 휴게소에 몇 번 들르고, 꽉 막힌 국도 위에서 산 강냉이 한 봉지를 다 비우고, 가요 테이프를 수십 번 들으면서 대여섯 시간을 달려야 했다. 차에서 내려 찌뿌둥한 몸을 펴면 시골집 특유의 마른 흙냄새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할머니는 아빠를 덥썩 끌어안으며 반가워했다. 아빠는 다섯 남매 중 가장 멀리 살았고, 혼자 남쪽에 살았다. 멀리 살아서였을까, 먼 길을 달려와서일까. 할머니는 아빠를 쓰다듬으면서 입버릇처럼 ‘딱한 것, 딱하기도 하지.’라고 했다. 할머니는 잘 웃고, 잘 껴안고, 자식들을 구석구석 칭찬하는 말을 잘하셨다.
넓은 시골집 마당엔 항상 마른 흙냄새가 가득했다. 집터는 마당보다 훨씬 높아서, 계단을 일고 여덟 칸 올라가야 마루에 앉을 수 있었다. 계단을 올리려고 시멘트를 발라놓은 지면 위에는 사촌오빠가 찍어놓은 발자국이 있었다. 그걸 보면 괜히 마음이 미지근해져서 단단한 바닥에 열심히 발을 굴렀다. 한동안 부러워했지만, 이미 굳어버린 땅 위에는 새 발자국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받아들였다. 그 발자국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내가 태어난 후였다고 해도, 소식을 듣고 때맞춰 가기에는 우리가 너무 멀리 살았다.
해가 떨어질 즈음엔 마루 위에 모기향이 놓였다. 매캐한 진녹색 향이 흙냄새로 가득한 콧속을 파고 들어 섞였다. 그 독특한 향을 맡으면서, 눈으로는 창문에 붙은 나방 그림자를 구경하고 귀로는 할머니의 노래를 들었다. 시골에선 농사일로 고된 몸을 달래기 위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음색은 약간 낮고 걸걸했다. 할머니는 소양강 처녀를 듣기 좋게 잘 부르셨다. 나는 할머니의 노래를 듣는 걸 좋아했지만 매번 낯을 가리느라 좀처럼 가까이 앉지는 못했다. 아직도 그 노래를 떠올리면 눈앞에 해가 저무는 것도 같고, 약간 쓸쓸하기도 하다.
마당 가운데에는 빈 개집이 있었다. 가끔 거기에 백구가 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름을 붙여서 예뻐하거나 집을 지키게 하지 않았다. 시골집에서 개는 가축이었다. 닭이나 돼지 키우듯이, 밥을 주다가 적당히 크면 잡았다. 키운 개를 잡는 집이 흔치 않다는 걸 안 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추석에 봤던 백구가 설날에 안 보이면 밥상에 올라온 국을 괜히 뒤적거리면서 불안해했다.
마당 건너편에는 빈 외양간도 있었다. 한때 온 가족이 농사에 열중한 흔적이었다. 고모들은 어릴 때 아빠가 얼마나 밭일을 잘했는지 아냐며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해줬다. 다 같이 밭을 맬 때 혼자서 한참 일찍 자기 몫을 끝내고 밭두렁에 앉아서 누나들과 형을 약 올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빠는 남매 중에 가장 힘이 넘치고 손도 빠른 아이였던 것 같다. 튼튼한 것은 복이지만, 손이 덜 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세 살 먼저 태어난 큰아빠가 몸이 약해서 보살핌을 받는 동안, 큰고모가 할머니 대신에 아빠를 돌봤다. 고모도 아기를 볼 줄 몰라서 포대기에 동생을 둘러업고 산 너머 친척집에 갔다. 이 이야기는 고모가 나한테만 따로 해줬다. 네 아빠는 애기 때 울지도 않고 순해서 어른들이 예뻐했다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고모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어떤 순서는 평생 바뀌지 않는다는 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집 마당의 발자국도 떠올랐다. 부모자식 관계도 한번 굳어진 형태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든 밑천을 큰아들 대학 보내는 데에 썼다. 작은아들을 위해서는 졸업 후에 스스로 학비를 갚을 수 있는 기숙사 학교를 찾아줬다. 큰아들의 대학 입학식과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작은아들은 혼자 이불짐을 들쳐 매고 시외버스를 두 번 갈아타서 낯선 도시에 있는 학교를 찾아갔다. 그 시절 연락수단은 우편뿐이었다. 집을 떠난 17세의 기숙사생은 편지로 소식을 듣고 용돈을 받아 생활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연락이 몇 달씩 끊기는 일도 있었다. 용돈이 끊기는 건 그렇다 쳐도 편지도 안 하는 게 무척 섭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아들을 그렇게나 섭섭하게 한 할머니는 내 기억 속에서 걸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두 팔을 벌리던 할머니와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본 열렬한 사랑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겨난, 더 선명하고 단단한 발자국의 존재 또한 사실이었다.
아빠는 나와 언니가 독립할 때까지 농담으로라도 핀잔 한번 주지 않고 매달 생활비를 챙겨줬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고, 졸업한 이래 계속 자취를 했다. 집을 떠나서 산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본가에만 가면 죽은 듯이 잔다. 처음에는 밥도 제대로 안 먹고 하루의 반 이상을 자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놀랄 때, 아빠는 본인도 똑같았다며 나를 깨우지 않았다. 그즈음부터 아빠는 나에게 딱하다는 말을 했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긴 여정에 지친 나를 두팔 가득 안으면서 ‘딱하기도 하지’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누가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이 싫었다. 가족이라도 싫고, 말 뿐이라도 싫고, 애정이 섞여있다 해도 기껍지가 않았다. 좋은 기억과 떨떠름한 기억이 뒤섞인 시골집이 떠올라서 더 그랬다. 다시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는 어른의 자격이나 증명을 논하는 말이 많다. 나도 몇 년 사이 깨달은 것들이 있다. 하나는 사랑은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 섞여있다면 골라내거나, 적당히 모른 척하거나, 그냥 같이 비벼서 삼켜도 웬만하면 탈이 나지 않는다. 사랑 아닌 것들도 마찬가지다. 매사에 좋다 싫다, 좋다 나쁘다 구별하는 데 너무 신경쓰면 마음이 자라나지 않는다. 좋고 싫은 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좋았던 것은 반복하고, 좋지 않았던 것은 변주하면 된다. 아빠가 그랬듯이.
또 하나, 성숙한 사람의 모습은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잘 생각할 줄 알고, 남들이 말하는 나 또한 나임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그걸 모르고 괜히 온갖 것들을 떨쳐내면서 홀로 서겠다고 우겼다. 그 바람에 어른이 될 기회를 얼마나 많이 놓쳤는지, 돌아보면 딱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제 나는 기꺼이 아빠의 딱한 자식이 된다. 헤아려보니, 고향에 간 아빠가 할머니를 마주안았던 그때가 딱 지금 내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