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언젠가 엄마가 이런 얘기를 했다. 네 언니는 나랑 성격이 비슷해서 사소한 거짓말도 훤히 들여다 보였다고. 그래서 더 많이 혼났다고. 그런데 너는 어릴 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예를 들면, 원래 엄마의 훈육 시나리오는 이런 식이었다. 반항하는 딸을 혼내면서 “이렇게 말 안 들을 거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딸이 엉엉 울면서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고 싹싹 빈다. 그다음 뭘 잘못했는지 복기하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새끼손가락 걸어서 약속하고, 마지막으로 안아준다. 첫째는 마치 대본을 받아 본 아역배우처럼 티키타카가 잘 됐다. 그래서 둘째한테도 써먹었더니 “나가!”라고 하자마자 바로 집을 뛰쳐나가는 게 아닌가. 분명 아이 마음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뻔했는데, 신뢰도 100% 예측 모델의 소유자였던 엄마가 나를 낳고 기상청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보는 계속되었다. 가족 구성원을 성격에 따라 분류하자면 엄마는 언니와, 나는 아빠와 한 묶음이다. 아빠를 보면 무슨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반대로 엄마나 언니와는 아주 사소한 일로도 오해가 생겨서 충돌한다.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의미가 되어있다. 오히려 유심히 들어주길 바란 말은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말을 할 때 하나하나 밑줄을 쳐서 짚어주고 싶었다. 이건 이런 뜻으로 한 말이고, 핵심은 여기라고. 가족이면서 그것도 모르냐고.
한동안 모녀 갈등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에 엄마가 또 비슷한 말을 했다. 가끔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나한테는 그 말이 마치 “더 이상 널 이해하려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이것 또한 엄마의 발언을 전적으로 내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일단 멈춰 선다. 사람이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문이라는 게 있다면, 꼭 백 개를 다 열어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발짝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이고 존중이다.
그런데 왜일까. 엄마가 노크 중단 선언을 하니까 너무 화가 났다.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중단 선언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 순간 느낀 답답한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것뿐이다. 벽이 있든 문이 있든 계속 직진하는 게 엄마의 방식이다. 나처럼 멈춰 서거나 못 본척하지 않는다. 계속 두드리고 파보고 부딪쳐 본다. 그 와중에 매번, 우리 사이의 벽을 처음 본 사람처럼 마음 아파한다. 전에는 그런 엄마가 코뿔소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부딪쳐오는 파도를 떠올린다.
우리가 너무나 다르다는 증거는 그동안 끝도 없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나와 같기를 서로 바라고 요구한다. 마음을 줄 때도 꿋꿋하게 내가 좋아하는 방식만 고수한다.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 저것보다 이게 더 맛있어.’하면서 받는 사람 입맛을 뒤로하고 내 생각을 우긴다. 밖에선 나도 어른의 탈을 쓴다. ‘이런 맛도 있었네요. 저도 이거 좋아해요.’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가족 앞에서 그런 건 다 소용없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더 관대하고 당신에게 더 가차 없다.
적당히 거짓말을 해 볼까.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이 얼마나 높고 단단한지 헤아려 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때,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을 것도 같다. 진심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기준치를 찾는다면, 우리에게 이롭게 작용할 수 있다고 합리화를 시도한다. 어쨌는 나는 엄마 앞에서만큼은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다. 거짓에 닿은 파도가 부서져버릴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