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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특기

by 은구


1. 탐색기

가을이 오면 나는 운동회보다 한글날을 더 기다렸다. 오전 수업을 빼서 한글 퀴즈나 백일장, 낱말퍼즐 같은 대회를 이것저것 열어서 상을 줬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했던 건 사전 찾기 대회였다. 각자 사전에서 제시어 여러 개의 뜻을 가장 빨리 찾아 적어내는 게임이었다. 기억하기로 매년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찾냐고 하면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평소에 사전을 자주 읽었다. 원래 알던 단어도 사전에서 새삼 다시 찾아보는 취미가 있었다. 사전적 정의가 주는 명확함과 산뜻함이 좋았다. 단어의 용례를 읽거나 유의어, 반의어를 익히는 것도 재밌었다. 수시로 사전을 펼쳐서 동화책처럼 읽던 나에게 제시어를 빠르게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학생 때는 검색 능력의 덕을 톡톡히 봤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잘 찾기 위해 최적의 웹사이트와 검색어를 고르는 과정이 재밌었다. 한 번은 전공 실험 시간에 유전자 시퀀스와 표현형질을 매칭하는 알고리즘을 짜는 과제가 나왔다. 쉽게 말하면 ‘짹짹’을 입력했을 때 ‘참새’를 출력하고 ‘삐약삐약’을 입력하면 ‘병아리’라는 출력값이 나와야 하는 건데,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았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참고자료를 검색하다가 어느 오래된 웹사이트에서 전체 해답을 통째로 찾아버렸다. 그 바람에 정답률이 수상할 정도로 높아져서 적당히 오답을 끼워 넣는 기행을 해야 했다. 검색 능력이 없었다면 안 그래도 고달픈 대학생활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2. 퍼즐 맞추기

대학 생활이 힘들었던 건 근본적으로 적성의 문제였다. 애초에 고등학교에서 이과반 진학을 선택했을 때부터 다들 의아함을 표시했다. “왜 이과로 갔어?” “왜 이과에 왔어?” 친구, 선생님, 가족 모두 나에게 물었다. 남들 눈에 아무리 봐도 이과형 인재는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수학을 잘하고 싶었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걸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고 싶었다. 산뜻하게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사전 읽기에서 수학으로 옮겨갔다. 돌아보면 내가 잘했던 건 퍼즐 맞추기였다. 개념을 배운 후에 문제를 푸는 과정은 퍼즐을 맞추는 것과 닮았다. 흩어진 조각을 맞춰가는 과정이 고생스럽지만, 완성한 후의 그림이 무엇인지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기에 마음 놓고 몰두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집어든 조각의 아귀가 빈틈없이 맞아 들었을 때의 쾌감은 가히 중독적이다. 고등학교 삼 년 동안 나는 퍼즐 놀이에 심취해 노력과 재능을 탈탈 털어 썼다. 수능 시험날, 하루 종일 시험을 친 후에 석양이 지는 낯선 운동장을 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거 안 할 거야.’라고 다짐했다. ‘이런 거’는 이런 것이다. 하루를 위해 몇 년을 사는 것. 잘 모르는 것에 닿기 위해 나를 짜내는 것.

나름대로의 거대한 퍼즐을 완성한 후 느낀 것은 성취감이 아닌 공허함이었다. 그땐 공허함에 취해 ‘퍼즐을 맞추는’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를 기다리는 건 무늬 없는 조각이었다. 조각 하나를 손에 쥔 채 여기에 그림을 그려야 할지, 다른 조각을 찾아 맞춰야 할지, 아니면 더 작게 조각내야 하는지 끝없이 헤맸다.


3. 영혼 탈곡기

대학교 2년 차에 접어들어서 나는 완전히 인정했다. 이과에 온 건 그리 현명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이미 짜낼 대로 짜낸 후라 전공 공부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겨우 졸업한 흔적은 성적표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애썼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대신에 다른 방향으로 계속 나를 짜냈다. 내가 네다섯살 즈음 처음 목수술을 받고 언어재활을 한창 하던 무렵, 갑작스럽게 다른 병으로 입원하게 되어서 치료를 중단했었다. 대학 생활이 버거운 건 적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생 살던 작은 동네를 떠나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게 버거웠다. 그러자 예전에 못다 한 언어치료가 아쉬워졌다. 대학병원 두 군데를 찾아갔고, 한 곳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사실 나는 수술 전후의 차이를 잘 체감하지 못했다. 주변에서도 그랬다.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람도,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의 말에 크게 낙심하지 않았고 후자의 말에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냥 나는 그때 그걸 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나의 과업이자 스스로에게 내린 신탁이었다. 사실은 수술 후 회복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후회했다. 회복실 안은 추웠고, 마취가 풀린 직후라 몸이 덜덜 떨렸다. 침을 삼키면 바늘을 삼킨 것처럼 아팠다. 아프고 추운 감각이 서러운 감정으로 이어졌다.

재활은 다른 방식으로 괴로웠다. 시옷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기역 발음을 할 때 어디에 주의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반복해서 연습했다. 내가 투수나 골퍼도 아닌데 입스가 뭔지 이해했다. 말 한마디 입에서 뱉기 전에 수만 가지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계속 병원을 다니는 것도 외로웠다. 대학병원은 사람을 자주 불러서 오래 기다리게 한다. 병원 로비에서, 대학로에서, 기차역에서, 기찻길 위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 울적한 마음만 나를 따라다녔다. 어쩔 땐 너무 가기가 싫어서 기차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방에 누워있다가 결국 택시를 탔다. 자잘하게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면서 지친 마음을 탓하는 버릇이 그때 생겨났나 보다.

여러모로 한계였다. 사실은 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미련이 바닥날 때까지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다 쏟아부은 끝에 못다 한 치료에 대한 아쉬움을 해결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내게 있는 모든 조각을 동원해 그림을 맞춰놓고도, 미완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결핍에 시달렸던 것인가. 그래도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긴다면 또 한 번 나의 등을 두드려줄 것이다. 끝까지 달려간 곳은 종종 막다른 골목일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돌아서는 나의 영혼이 약간 가벼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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