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담당자의 말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자기소개의 순간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이었다. 앞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내 말을 잘 못 알아듣지 않을까. 그것 하나만 걱정했다. 나는 네다섯 살 즈음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재활훈련 치료를 다니며 발성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마음이 급하거나 몸이 피곤할 땐 가족들도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 최초의 걱정을 극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다음에는 내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사람과 비슷하게 해서 묻어갈지, 아니면 조금 다르게 해서 지루한 릴레이에 변화를 주고 싶은지 계속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상황과 사람과 분위기를 계속 파악하고, 말하는 순간까지도 고민하고, 다 하고 나서는 왠지 허무했다. 걱정한 것보다는 별거 없어서.
지금은 그런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나를 소개한다. 하나 원칙이 있다면 스스로를 정의하는 표현을 피하는 편이다. 짧지 않은 사회생활을 통해 여러 명의 반면교사를 만나며 생각한 것인데, “나는 엄청 ㅇㅇ한 사람이다”라고 강조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다지 ㅇㅇ하지 않았고, “난 절대 ㅁ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ㅁㅁ했다. 자기모순은 인간 공통의 숙제다. 그래도 남들에게 그런 우스운 꼴을 보이는 건 최대한 예방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되는 정도의 말만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어쩌면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기억에 남았을지 모른다. 나 또한 과거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 중 몇몇의 소갯말을 아직도 기억하기 때문이다.
거의 십 년 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할 때였다. 별거 아닌 내용을 장황하게 늘여서 쓴 자기소개서를 여기저기 뿌리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때는 대졸 공채로 대규모 채용이 흔하던 때라 한번 면접을 보러 가면 넓은 공간에 면접자가 몇백 명씩 있었다. 빌려 입은 티가 나는 정장을 입은 지원자들과 달리, 잘 맞는 옷을 입고 사원증을 건 면접관들은 훨씬 그럴듯해 보였다. 우리는 깍듯하고 싹싹한 인상을 줘야 한다는 강박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대기실에 나타나면 얼른 일어나서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그중에서도 정말 잘하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면접이 있었다.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인상을 주는 회사였다. 대기 장소에 가니 담당자가 다가와서 한 명씩 인사를 했다. 그분은 안경을 썼고,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고, 당시 3-40대에 걸친 나이로 보였다. 이름을 들으니 인사팀에서 채용을 담당하는 과장님이었다. 채용 관련 공지가 매번 그분의 이름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다들 단번에 알아봤다. 줄줄이 서서 열심히 인사하는 지원자들에게 과장님은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중요한 사람 아니에요.”
뜬금없는 인사말에 뭐라고 반응할지 몰라서 일단 웃어넘겼다. 과장님은 나중에 들어온 지원자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중요한 사람 아니라니까.”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어휘 선택이 독특했다. 면접은 하루 종일 진행됐다. 바쁘게 면접장 안을 이리저리 다니는 과장님을 볼 때마다 그분이 한 자기소개가 떠올랐다.
입사 후에는 과장님과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게시판에 올리는 글이나 메일을 읽어보면 늘 탁월한 전달력이 돋보였다. 생성형 AI가 없던 시절, 직접 고민해서 적확한 표현을 골라 엮은 글이라 개성이 드러났다. 정보량이 굉장히 많은 글도 깔끔하게 전달하고, 사람이 많은 행사에서 사회를 볼 때 너무 무겁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분위기를 이끄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다. ‘중요한 사람 아니다’라는 소개가 아무 맥락 없이 나온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이 지나 ‘안정적이고 전문적’이었던 회사에 대한 인상은 ‘지루하고 편협’하다는 결론으로 바뀌었다.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회사를 떠났고, 이후 업계와 직무 모두 많이 바뀌었다. 애초에 나는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회사에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늘 새로운 것을 쫓아다니는 유형의 직장인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과 프로젝트를 찾아 자리를 바꾼다. 그래서 지난 몇 년 간 많은 면접을 봤다. 면접자일 때도 있고 면접관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 작년 여름 어느 날, 팀에 사람이 필요해 면접에 들어갈 일이 생겼다. 채용 기준에 대한 상사의 의견에 내심 동의하지 않아서 심란한 상태로 면접을 시작했다. 긴장감을 숨기지 못한 면접자는 내가 들어가자마자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다. 순간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중요한 사람 아니에요.’ 끝내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뱉지 않고 삼킨 그 생각이 실제로 한 말 대신 내 안에 계속 남아있다. 결국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는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다.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중 어떤 말은 꺼내고 어떤 말은 남겼는지. 왜 그랬는지. 그 모든 선택의 총합이 나인 셈이다.
그때 그 과장님을 다시 보게 된다면, 직접 마주치기보다 누군가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상황이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얼른 다가가 몰래 들어보고 싶을 것이다. 예전에 자신이 ‘중요한 사람 아니’라고 소개하던 그분이 요즘엔 어떤 말로 자기를 설명하고 있을까. 만약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사람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여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