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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세계

참치의 이야기

by 은구

어느 날 문득 ‘어른에게도 미술시간이 필요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로잉 수업을 신청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화방에 갔다. 선생님은 수업자료를 보여주며 이것저것 설명을 하시더니, 드로잉은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니라 관찰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 손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의 최대치는 어디까지나 내 눈으로 보아낼 수 있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연습해 보니 내 손재주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다. 몇 주에 걸쳐 그림 하나를 붙들고 있다 보면 마지막엔 질려서 손을 놓게 된다. 그래서 그릴 대상을 잘 골라야 했다. 나는 거의 항상 참치를 그렸다.

참치는 우리 집 강아지다. 중학생 때부터 키운 몸무게 1.9kg의 작은 요크셔테리어. 어릴 때부터 언니와 나는 계속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강아지를 키우는 지인이 어디 여행 간다는 소식만 들으면 맡아주겠다고 나서고 다녔다. 처음 맡은 강아지는 해피라는 이름의 말티즈였다. 당시에 나의 과외 선생님이 키우는 강아지였다. 해피는 차분하고 똑똑한 강아지였는데, 집 밖에만 나가면 동네가 떠나가라 짖곤 했다. 납치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다음 맡은 강아지는 예림이라는 요크셔테리어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엄마의 친구분이 딸처럼 키우는 공주님이었다. 우리한테 예림이를 맡기면서, 눈물을 닦을 때는 꼭 휴지가 아니라 티슈를 써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다. 예림이는 이틀 내내 꼭 사람 무릎이나 소파 위에만 앉았고, 내가 곰인형만 들고 있어도 왕왕 짖으면서 샘을 냈다. 그 후 반년쯤 지났나, 대뜸 엄마가 강아지 정말로 잘 키울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우리는 신나서 진짜 진짜 잘 키울 수 있다고 맹세했다. 얼마 후 광복절 휴일날, 정말로 강아지가 찾아왔다. 크고 우아한 예림이네 고급 세단을 타고.


조수석에 덜렁 놓인 강아지가 유독 작아 보였다. 예림이 어머니는 사료를 같이 챙겨주시면서 원래 예림이랑 같이 키우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잘 키우라고 당부하고 가셨다. 나는 처음 본 순간 ‘얘는 좀 못생겼네’라고 생각했다. 집에 데려가 자세히 보려 했는데, 소파 밑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쓰다듬으려고 하면 움찔거리면서 곁눈질을 했다. 겁 많은 강아지의 이름은 원래 꼭지였는데,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이 너무 심하게 때려서 참다못한 옆집 이웃이 ‘그렇게 키울 거면 우리 집에 줘라’고 했더니 정말 줬다고 한다. 그 이웃도 강아지를 키울 형편은 되지 않아서 적당한 집을 수소한 곳이 예림이네였지만, 곰인형도 견제하는 예림이가 동생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렇게 이집저집을 떠돌다가 우리 집에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얘기를 듣고 나서 당장 새 이름을 짓기로 했다.

새 이름은 참치라고 지었다.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금색이랑 회색 털의 빛깔이 참치와 비슷하다. 덩치가 엄청 작은 건 참치와 다르다. 신나서 팔딱팔딱 뛸 때는 참치와 닮았다. 수영을 못하고 멍멍 짖는 점은 참치와 다르다. 참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소파 밑에서 나왔다. 손을 피하지 않고 눈도 맞추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뻐할수록 참치가 더 예뻐졌다. 고등학생 때, 야간자습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열두 시 사십 분이었다. 부엌 조명만 켜진, 모두가 잠든 조용한 집에 나를 반기러 나오는 참치의 발소리만 타닥타닥 울렸다. 현관 앞에 앉아 같이 놀다 보면 하루의 긴장이 다 풀렸다. 대학생 때, 부모님은 시골의 전원주택으로 이사 갔다. 참치는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개구리를 잡고 놀았다. 마당에 들어온 고양이한테 용감하게 달려들었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또 몇 년 후, 언니와 내가 서울에서 같이 살기로 하면서 참치를 데려왔다. 참치와 함께하니 일상의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인사하는 이웃이 생기고, 낯선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자주 찾는 카페도 생겼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매일매일 귀여운 참치를 일 년 내내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다 SNS에서 동물 계정의 세계를 발견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려동물 사진이 수십 개씩 올라오는 복실복실한 세계를. 바다 건너 일본에 요키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참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카라아게쨩, 유즈군, 코타쨩 같은 이름의 강아지들과 친구가 되어 바다 너머로 매일 하트를 주고받았다. 가끔 ‘매우 귀여운!’ 같은 댓글이 달리면 자동으로 하회탈 미소가 지어졌다.

참치는 따뜻한 걸 굉장히 좋아했다. 방석만 한 미니 온열매트가 참치에겐 캘리포니아 킹 사이즈 라꾸라꾸 침대였다. 찜질을 하느라 흐물흐물하게 퍼진 액체참치는 수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따뜻한 걸 좋아하는 참치의 산책을 위해 생전 안 해본 뜨개질도 했다. 손이 느려서 아대만큼 작은 목도리 몇 개를 뜨고 나니 겨울이 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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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코로나가 한창일 시기, 언니와 다시 따로 살게 되면서 참치를 마당이 있는 본가에 데려다 놓았다. 이때 참치가 못해도 열여섯 살은 됐을 것이다. 이미 췌장, 턱뼈, 눈이 해마다 안 좋아지고 있었다. 영상통화 화면 속에서도 움직임이 느려진 게 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당을 눈앞에 두고도 자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주말에 보러 가려고 기차표를 예매했는데, 그 전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참치의 마지막 순간을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이렇게 할 걸, 그렇게는 하지 말 걸, 많이 후회하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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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길을 걷다가 강아지를 보면 그리운 마음이 든다. 사진에도 그림에도 담기지 않았던 귀여움은 이제 몇몇 사람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참치와 함께한 세계도 그립다. 그 세계는 아주 넓기도 하고, 아주 작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산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뜨개질을 했다. 참치와의 이별에 힘들어할 때, 그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어떻게 힘든지 가장 잘 이해하고 위로해 주었다.

분명 잘 키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데려왔는데, 돌이켜보면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참치도 우리를 잘 돌봐주었다. 지금도 나는 산책을 하고, 그림은 가끔씩 그리고, 뜨개질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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