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융과 여와보천

3-05

by 임헌수



축융은 환국에서 이주해 온 조왕각시들의 후예이다. 조왕각시들은 수인천녀로부터 불의 사용법을 전수받은 고시족의 일파인데 자신들의 선조인 조왕할망을 부뚜막신으로 모시고 사는 불을 매우 잘 다루는 사람들이다.

축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섯 가지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뛰어난 재주가 있는데, 여섯 가지 불의 첫째는 천상화 태양이고 둘째는 벽력화 번개, 셋째는 산두화 산불이며, 넷째는 산하화 아지랑이, 다섯째는 복등화 등불이고, 여섯째는 노중화 화톳불이다. 불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변화무쌍하다. 변덕스러워서 다루기가 힘들고 위험하다. 잘 관리된 불은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반대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수인천녀께서 특별하게 조왕각시들에게 불을 잘 관리하는 비법을 전수해 준 이유는 불의 위험성 때문이다. 불을 마주하는 중요한 마음가짐은 평정심과 인내심인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거나 조급하게 처신하게 되면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런데 조앙각시들은 특유의 차분함과 참을성으로 불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는 선천적인 소양을 간직하고 있기에 수인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축융은 도시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이미 도시 내부에는 불을 앞세운 축융의 무서운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도시를 빠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축융은 여와에게 부탁하여 이들이 임시로 거처할 땅을 마련해 주었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은 불의 위력 앞에 한 줌의 재 만도 못될 알량한 재산을 지키려고 미쳐 날뛰었고 급기야는 난민들을 돕고 있는 축융족을 공격하였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축융은 마지막 수단인 불을 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고뇌를 떨쳐버릴 수 없어서 하늘의 뜻을 알아보려고 천제단에 올라 간절히 기도하였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크고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심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땅이 흔들렸다.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도시가 반쪽으로 쪼개졌다. 갈라진 틈새로 구조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과 가축들이 땅속으로 쓸려 내려가거나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도시에 떨어졌다. 도시 중심의 높은 곳이 무너져 내렸고 곳곳에 화재가 발생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후에도 서너 번 땅 흔들림이 계속되었고 번개가 연속해서 내리쳤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준엄한 하늘의 심판을 목격한 축융족과 여와족 사람들은 천벌의 무서움에 몸을 떨었고 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축융과 공공의 이야기는 여와보천의 신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너무 신격화되어 분명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지만, 숨겨진 뒷 이야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흥미 있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다.

물의 신 공공은 머리는 붉고 사람의 몸통에 하반신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강과 호수를 다스리는 아홉 개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갖고 있는 상류라는 하인을 거느리고 다녔다. 여와가 갖고 있던 세상을 통치하는 권좌를 탐내온 공공은 여와를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불의 신 축융은 공공에 맞서 싸웠는데 몸통은 붉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불을 토해내는 두 마리의 화룡을 타고 태양가까이까지 날아다녔다.

공공과 축융의 싸움은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며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무지막지한 전투는 여와의 도움을 받은 축융의 승리로 끝이 났고 화를 참지 못한 공공은 부주산에 머리를 박고 죽고 말았다.

부주산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인데 공공의 박치기에 하늘의 한쪽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깨진 하늘 틈에서는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렸고 갈라진 땅사이로 화염이 솟아올랐다. 땅에는 사나운 맹수들이 사람을 해치고 다녔고 하늘에는 괴조들이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낚아채 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류 창조의 여신인 여와는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부서진 하늘과 땅을 보수하였다. 알록달록한 오색돌을 끓여서 찢어진 하늘을 메꾸었다. 그리고 커다란 거북의 다리를 잘라 기둥으로 삼아서 기울어진 하늘을 받쳐 올렸다. 갈대를 태운 재로 화염을 덮어 잠재우고 흑룡을 잡아 죽이고 괴조와 맹수들을 퇴치하였다.

하늘과 땅은 제자리를 찾고 안정되었다. 짐승들은 온순해지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게 되었고 들판에는 곡식들이 다시 자라나서 먹을 것이 넉넉해졌다. 세상은 예전처럼 살기 좋아지고 사람들은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힘든 일을 끝마친 여와는 너무 지쳐서 깊이 잠들었으나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법도를 무시한 무리들의 최후를 목격한 축융족들은 더욱 겸손해지고 침착해졌다. 불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해지고 탐구적이 되었다. 불의 본성은 물질이 아니라 기운이며 불이 의존하고 있는 물체에 따라 열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구리를 녹일 수 있는 고차원의 기술을 터득하였고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단단한 농기구와 날카로운 무기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삶의 질과 형태가 크게 바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축융족들은 여와의 땅에 인접한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기라고 불렀고 땅의 이름을 따서 축융족들은 기 씨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불을 사용하는 기술로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았는데 훗날 이 관직을 축융, 축송, 축화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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