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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에는 흰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들판에는 산들바람이 풀잎을 스치며 가볍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새들은 높은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멀리서 목동들의 풀피리 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온다. 풀밭 위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청년이 있는데 얼굴빛은 희고 용모가 반듯하고 단정하였는데 무언지 모를 수심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헌원이 이곳 헌구에 내려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는 원래 신농국에서 짐승들을 길들이고 맡아 키우는 직책을 담당했으나 소질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고향인 헌구로 내려왔다.
헌원의 어머니는 부보인데 유교씨의 가문이다. 신농의 어머니와 같은 집안으로 대대로 누에치기와 옷감 짜기로 명성을 이어온 제후이다. 유교씨 아낙네들은 자신들은 마고할미이자 직녀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으며, 직녀성을 이승에서 삶을 다한 후 돌아갈 고향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부보는 밤하늘에 번개가 북두칠성을 휘감는 광경을 보고 감응해서 잉태하고 헌원을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운이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다.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을 했다. 어려서는 영리했으며 성장하면서는 성실하고 민첩했으며 장성해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헌원의 아버지는 유웅 씨의 군주인데 이름은 제민이다. 유웅국은 궁산산의 남쪽이자 희수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옛날에는 백민국에 딸린 땅이었다. 백민국은 용어의 북쪽 땅에 본거지가 있는데 사람들의 몸은 희고 머리카락을 풀고 살았다. 낙타를 타고 산악지방과 사막지대를 오가며 서역의 옥돌과 곡식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주로 하며 살아왔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은 희수 강변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유웅족들과 결합하였다. 유웅족들도 호탄에서 나오는 옥석들과 옥수수, 수수 등 곡물을 동쪽의 신농국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콩 등의 농산물로 교환해 오는 교역활동을 하였다.
헌원은 부왕의 뒤를 이어 대상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교역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어머니 나라와 아버지 나라를 연결하는 일이라 여러 제후들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어서 사업이 순조로웠다. 또한 헌원은 덕으로 사람을 대하고 예로서 상대방을 맞이하니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고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품어 왔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헌원은 주로 유웅국과 신농국을 오가며 활동하였는데 가끔씩 청구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청구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풍산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주위로부터 자부선인의 거처가 이 근처라는 말을 들은 헌원은 찾아가서 만나보고 지혜를 얻고 싶어졌다. 선인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으나 막상 찾아뵙는 것은 두려웠다.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도가 아니라 속세의 권력이기 때문에 속 마음이 드러날까 봐 걱정되었다.
자부선인의 거처는 삼천궁이라 불리었는데 이름과는 달리 소박한 초막 서너 채가 산허리 춤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님은 마침 집에 안 계셨고 산꼭대기로 기도정진하러 가셨는데 언제 내려올지 모른다고 했다. 헌원은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다. 선생님을 대면하기 전에 세속에서 물든 때를 조금이라도 씻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닷새째나 물만 먹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선인은 집으로 돌아오셨다. 헌원은 일어나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선생님께 예의를 표했고 선생은 용의 얼굴을 닮은 헌원의 늠름한 모습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겠다고 깨달은 헌원은 자신의 숨겨놓은 야망을 시원하게 털어놓았고 비록 천손의 후예는 아니지만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한 선생은 마치 초대 환웅천왕님께서 웅족과 범족을 선도사상으로 교화하였듯이 이 젊은이에게 삼황의 도를 전수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삼황은 천황, 지황, 인황인데 천지인을 매우 존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높여 부른 것이다. 천황의 진면목은 티끌 하나 없이 크나큰 맑음이기에 태청이라고 한다. 태청은 하늘 본연의 모습이자 추구하는 의지의 목적이다. 맑음의 본질은 비교불가한 절대성과 완전무결한 완벽함이다. 맑음이란 우주 질서를 관통하고 있는 근원적 진리이고 모든 존재의 핵심적으로 깃들어 있는 본성이다. 지황은 하늘의 맑음을 그대로 이어받은 뛰어나게 맑은 상태이기에 상청이라고 한다. 땅 위에 펼쳐져 있는 맑음은 모두 태청에서 비롯되었고 상청의 본성은 태청과 하나이다. 태청은 관념적인 경지이지만 상청은 물질과 결합된 내면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다르지 않고 하늘과 땅은 한 가지 뜻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황은 사람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귀한 맑음이라서 옥청이라고 한다. 사람은 잉태될 때부터 태청과 상청의 진심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맑고 깨끗하다. 옥청이 때 묻지 않고 거울처럼 맑으면 상청을 볼 수 있고 상청이 보이면 태청을 감지할 수 있다. 옥청과 상청과 태청은 일맥상통하고 옥청은 상청과 태청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맑음으로 풀어놓은 삼황의 개념은 환인천제님께서 천손들에게 내려준 천지인과 원방각의 원리이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늘의 베풂을 바르게 알아차려 온 세상에 실현하라는 것이 천제님의 가르침인 재세이화 홍익인간인 것이다.
헌원은 삼천궁에서 서너 달 머물면서 선도 수행법을 몸에 익혔는데 도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스스로 양생 하는 이치는 터득하였다. 또한 천문을 읽고 지리의 유리함을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덕을 두텁게 하여 인심을 얻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돌아가는 헌원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이 가벼웠다. 가슴이 뚫리고 머리가 맑아졌다. 마치 긴 어둠의 동굴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헌원은 이국땅을 돌아다니며 풍찬노숙하는 생활을 접고 궁상산 남쪽에 터를 잡고 정착하기로 했다. 이 땅은 후에 황주라 불리는데 황토가 많은 곳이라 곡물이 잘 자라지는 않지만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라서 물산이 넉넉한 곳이었다.
헌원은 거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기장과 수수를 기르게 하고 서쪽 땅에서는 옥수수를, 동쪽나라에서는 콩을 수입하여 곡물을 풍부하게 하였고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게 하여 토굴에서 지내던 불편한 생활을 버리고 안락하게 살게 하였다. 맑은 샘물이 나오는 큰 우물을 파고 주변에 넓은 광장을 마련하여 길 위에서 고생하는 상인들이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게 하였다.
헌원의 높고 밝은 이름은 소리 없이 퍼져나가 많은 인재들이 주변에 모여들었고 상인들은 여러 지방의 물자들을 쉴 사이없이 실어왔다. 나라는 커지고 부강해졌다. 백성들 수는 늘어나고 물자는 풍부해졌다. 헌원을 둘러싼 모든 주변환경은 그의 야망과 목표를 향해 하나씩 하나씩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