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바람에 날리며 산과 들에 내려앉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났건만 골짜기에는 아직 녹지 않은 잔설들이 남아 있었고 나뭇가지들은 겨울 모습 그대로 앙상하였다.
유망은 높은 언덕 위에 올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쌓인 눈에 반쯤은 덮여있어서 온전히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꺾어진 깃발과 부서진 수레바퀴, 버려진 무기와 희생된 동물의 사체들이 격렬했던 어제의 전투상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유망은 신동의 8대 후손이다. 제과, 제승. 제명, 제직, 제리, 제애에 이어 재위를 물려받았다. 신농국은 대대로 이어오면서 크게 발전했는데 그 영역은 동쪽바다에서부터 서쪽 황토고원까지, 북쪽 산악지대에서부터 남쪽 호수에 이르기까지 광대했다.
여러 명의 제후들이 각자의 지역을 다스리며 유망을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는 부족공동체였다. 주종관계가 아니고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관계이며 무력연맹체는 더욱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후들이 혈연으로 연결된 끈끈한 공동체였으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유망의 힘이 쇠약해지면서 제후들 간에 사이가 벌어지고 심지어는 서로 반목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헌원은 제후들을 하나씩 하나씩 무력으로 정벌하며 신농국으로 쳐들어갔다. 유망은 제후들에게 맞서 싸우라고 했지만 제후들은 힘이 약하거나 내키지 않아서 유망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망은 홀로 침입자들을 막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농사를 지으며 다툼 없이 살아온 신농국 주민들에게 창과 방패로 무장한 헌원의 군사들을 대적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헌원의 잘 훈련된 군사들은 유망의 선두부대를 쉽게 무너뜨렸고 뒤이어 큰 곰, 이리, 표범 등 야생동물을 풀어놓아 후방을 지키고 있던 유망의 농민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삽시간에 전쟁터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망치는 병사들은 뒤따라오는 기마병들의 칼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유망은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제정신이 아닌 병사들을 다독여 산비탈 요새로 퇴각하였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병들도 다친 몸을 이끌고 요새로 피신하였다.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는 유일한 길은 기습공격이라고 판단한 유망은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야심한 밤을 틈타 헌원의 본진을 급습하였으나 미리 눈치채고 준비해 놓은 함정에 빠져 도리어 독 안의 쥐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유망은 호위무사들의 목숨을 내던진 분투 덕분에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전쟁에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화이다. 천시를 믿는 것은 경솔하게 사람들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라 신중하게 나아갈 바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글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을 구분하고 소극적으로 기다린다는 느낌이 있어 다소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한편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인다. 결국 천시를 얻는 것은 만반의 준비와 태세를 갖추면 때는 자연스럽게 열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지리는 자연의 환경과 지형적 특징을 잘 파악하고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인데 언덕에 기대어 성을 쌓거나 강물을 끌어다 해자를 만드는 일 등을 말하고 비와 바람, 안개 등 날씨의 변화를 미리 예견하고 잘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인화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협동심과 단결력을 말하는 것인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세 가지 근본요소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요소이다.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 하늘이 주는 운은 지리상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상의 이로움도 사람들 사이의 일치단결만 못하다. 단결정신과 결전의지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지도자의 인품과 덕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망은 천시를 얻을 수 없었고 지리를 이용하지 못했으며 제일 중요한 인화를 이루지 못했다. 누가 봐도 이 싸움은 유망에게 승산이 없었는데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유망은 천제단에 올라 하늘에 마지막 천제를 올리고 높은 산에 아주 큰 봉화를 피워 올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천왕님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주변 배달국 연맹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헌원의 군사들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피워 오르는 봉화연기를 보고 나서 더욱 서둘렀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기세로 신농국의 마지막 관문을 향해 돌진해 왔다. 헌원 진영의 신병기이자 주력무기는 전차인데 전차를 굴러가게 하는 수레바퀴는 헌원의 발명품이라 전해진다.
헌원은 봉초가 바람에 뒹구는 모습을 보고 수레를 고안하였다고 하는데, 수레바퀴의 발명은 운송수단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실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전차를 개발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유망은 삼중의 방위선을 구축하고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였으나 전차부대의 질풍노도와 같은 진격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신농국의 백성들은 변변한 무기 없이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유망도 고군분투하였으나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고 혈연관계가 있는 소호에 의탁하려고 피난길에 올랐다.
부상병들과 함께 움직이는 피난행렬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마차를 앞세운 추격군은 빠르게 뒤쫓아 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하는 절망의 순간에 갑자기 큰 함성소리와 함께 무수한 화살이 비 오듯이 헌원의 군사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소호진영에서 보낸 선발대였다. 머리카락 한올 숨길 데 없는 허허벌판에서 화살세례를 받은 헌원의 병사들은 태반 이상이 희생되었고 살아서 되돌아간 병사는 거의 없었다.
유망은 소호의 본영에 인도되었으나 죽어서 선대 제왕들을 뵈올 면목이 없다는 회한과 함께 신농국 백성들을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