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겨울 보령산 중턱의 판자촌, 유난히 춥던 그날.
우리는 무너지지 않아.
https://youtu.be/-AIosDM9NxA?si=USWXi3FzlodT_9ko
얼마전 브런치 작가 제안을 받은 작품, “사형수의 눈물”이라는 뮤지컬에 대해 리뷰해 보고자 한다. 앞서 신뢰해주신 예풍의 기획자님께 감사드리고, 실제 사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과 작품에 대한 리뷰에 올곧은 심성을 기반으로 사명감을 가질 것이라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목차
1. 불타는 집 앞에서
2. 1977년, 광주의 겨울
3. ‘사형수는 울었다’가 말하는 것
4. 내 마음에 남은 울림
5. 마치며
-만약 당신의 집이 불타고 있다면, 그 순간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2020년 11월. SBS꼬꼬무에 ‘무등산 타잔 박흥숙’ 편에 나온 이야기가 바로, 이 뮤지컬의 모티브라고.
https://youtu.be/0xT74LSr0yE?si=Hej3RcNVLNTTCzBA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우선 꼬꼬무 시청을 해보기로 했다.
박흥숙은, 꿈 많고 가난한 집을 일으키려고 20시간동안 공부하던 성실한 청년이다. 배려심많고 인품도 다정하여 처음 철거반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있었을 땐 자신의 동생을 달래기도 했다고. 이런 그가 사람에게 둔기를 휘두른 이유는, 자신의 집이 아닌 노인들의 집에 불이 났을 때. 크게 분노하며 5명에게 둔기를 휘둘렀다고 한다.
뮤지컬“사형수는 울었다”는 위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뮤지컬로 “현석”이라는 캐릭터가 박흥숙의 스토리를 빌려 이야기가 전개 된다.
그는 자수 한 뒤, 자신이 죽인 분들에게 사죄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피고, 죄를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진술을 하십시오.
먼저, 저의 지난 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안타깝게 희생되어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저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궤변이라해도 좋습니다
하오나
다음번에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 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몸으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린 저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저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 것 없는 집이었지만
짓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만이 이 나라 국민이고
죄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그들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을 보십쇼.
그들이 불쌍하지도 가엾지도 않단 말입니까?
저는 그들도 국민이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중 받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문장을 보고 가난에 떨었어야 했던 그들의 설움이 스쳐갔다. 억울하게 가라앉아야 했던 그의 외침이 들리는가.
뮤지컬로 재탄생된 이 이야기는 노래와 이야기, 또 배우들의 연기로 그때의 설움을 생생하게 재연해준다.
-그들의 꿈, 희망, 기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무너진 순간.
그들은 단순히 판자로된 집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희망을 잃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살 권리 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인가.
정부에서 어떤 지원 체계를 갖추고 철거한다면 모를까, 죄없는 이들의 집을 허무는 것도 모자라 최소한의 인권 조차 보장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땅을 파서 들어가라, 그건 봐주겠다.” 라는 말까지. 그때는 화려한 도시의 부자들과 달리, 가난한 이들은 최소한의 존중조차 받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때 무너진 건, 집이 아니라. 그들의 존엄이었다.
-가난이 죄가 되어야 하나요.
이 작품은 단순한 사형수의 일대기가 아니라, 국가가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숙제를 주는 이야기다.
우리는 자주, 본능처럼 가난을 혐오한다. 하지만 그 혐오는 단순한 생존의 두려움이 아니라, 오래도록 사회가 심어놓은 낙인의 습관이다. 가난을 게으름의 결과라 오해하며, 그 억울함을 풀려면 출세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를 아래에 두고,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서열을 나눈다.
이 공연에대해 기획팀에게 받았던 메세지 중 하나.
<‘가난’과 국가의 역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 있었다.
인간은 다양한 사정에 의해 가난해진다. 가난은 언제나 한 사람의 게으름이나 무능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이 원인이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예기치 못한 사고와 질병, 혹은 시대의 불운이 그를 가난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사회 구조 자체가 불평등을 강화하기도 한다. 교육의 기회가 차단된 사람, 정규직 일자리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 안전망이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만 낙인찍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냉혹한 말을 던진다.
그러나 가난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는 가능성이고, 인간의 존엄을 잃게 하지 않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혐오와 낙인은 끝내 우리 모두를 향한 부메랑이 되고 만다.
이제, 우리가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내밀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난,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됐으면 해.
아직 관람 전이지만, 이 글을 보며 사회가 좀 더 사랑이 많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당장에, 내가 지내는 시설에도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외로움에 떨며 지내는데, 이런 곳에서 지내지 않고 고독한 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다들 성공을 외치고, 어떻게 해야 더 이득을 볼까 애를 쓰지만, 그 전에. 우리는 부족한 사회 시스템에 대해 생각은 해보았는가.
조금 더 서로에게 관대해지길, 사랑하길.
오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어보자. 또, 이 공연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하다보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