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K는 독일 사람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한국 사람 다 됐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며 명절도 같이 보내고, 서로 아프면 뛰어오던 사이.
아저씨에게 K는 피는 안 섞였어도 ‘가족’에 가까웠다.
K도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정서가 절반쯤 한국인이었다.
누가 밥 사주면 “다음엔 내가 살 차례구나” 하고 알고,
뭘 먹으면 세 번쯤 권해주는 것이 예의라는 것도 깨우친 사람.
아저씨는 그런 K를 보며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이제 K는 거의 한국 사람이라. “
그런데 이제 반대가 되었다.
우리가 독일에 와 있고, 아저씨가 ‘방문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아저씨가 K의 문화를 배워야 했다.
가장 먼저 부딪힌 건 일요일 휴무 문화였다.
아침 일찍 부스럭거리며 옷을 챙겨 입는 아저씨.
“어데 갈라꼬? ”
”내 슈퍼 쫌 갔다 올라고. 오늘은 왠지 파스타가 땡기네. 스파게티 면 좀 사 올라꼬. “
”보소. 여기 일요일이라서 문 안 열어여. “
”아- 맞네. 내 또 까묵었다.
근데 진짜 이상하네. 일요일에 문 닫으믄 사람들은 도대체 뭐 묵꼬 살으라는 기고? “
아저씨는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일요일은 고마 집에만 쳐박히 있으라는 기가? 여 뭐 절간이가? 온 동네 사람들 다 같이 손에 손잡고 하느님 만나러 갔는 갑지? 문도 안 열고? ”
절이라고 했다가 난데없이 하느님?
불교와 기독교를 대통합시키는 아저씨였다.
트램도 아저씨에게 신세계였다.
K가 티켓 없이 우선 그냥 타면 된다고 하자 아저씨 눈이 빛났다.
“엥? 그라믄 혹시 공짜가? ”
그럴 리가. 독일에서 공짜라니 꿈도 야무지다 생각했다.
“트램…에서 표를 사. ”
K가 서툰 한국말로 아저씨에게 말하고, 계산했다.
표를 받은 아저씨에게 일러줬다.
“여기는 표 검사를 갑자기 해여.
검표원들이 아무 데서나 트램을 타서 표를 보자 칸데이. 나도 두 번 만났어. “
아저씨는 그 말에 신이 났던 걸까?
표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혹시 검사하러 올지도 모르자나. ”
그러고는 같이 트램만 타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검은 코트 입은 사람만 봐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 온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냥 출근하는 독일인이었다.
“언젠가는… 검표원 만날 거라. ”
아저씨의 그 말투는 거의 동화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렇게 보면 아저씨는 여전히 적응 중이었고, K는 하나 하나 그에게 보여 주고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상대의 방식을 배우며 살아온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다음에 OO이 올 때는 미리 물어 보고 오면 좋겠어. “
의미는 단순했다.
일정 조율, 준비, 실무적인 이유.
아주 독일 사람다운 말이었다.
불편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전달했을때
아저씨의 얼굴에는
말하지 못한 서운함이 조용히 스쳤다.
“내가 독일 오는 게 불편한 거가?
K는 내랑 다른갑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아저씨는 K를 정말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가족은 예고 없이 찾아와도 괜찮은 존재라고 믿는 마음.
그 마음이 오래 쌓여서, K의 말이 조금 서늘하게 들렸던 것.
아저씨는 “알겠다”라고 했지만
말끝이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그 표정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나지막이 말했다.
“내… 예전처럼 대하기가 쫌 힘들 것 같아여.
마음이… 쪼매 그렇네.”
#괴산아저씨 #독일생활 #문화차이 #이민일기 #외국에서 #정에 대하여 #생활유머 #캐릭터에세이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