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해남 K마을 하얀 이무기의 실화
몇 해 전, 강원도 태백에서 길이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렁이가 목격됐다는 뉴스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사람들은 “이건 단순한 뱀이 아니라 이무기 전설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며 술렁였다.
실제 사진까지 공개되며 논란은 커졌고, 누군가는 겁에 질렸고 누군가는 놀라워했다.
그러나 내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태백이 아니다.
전라남도 해남 ‘K’ 마을에서 있었던 실화다.
어쩌면, 태백에서 목격된 그 거대한 구렁이보다 더 길고, 더 무겁고,
더 오래도록 가슴을 짓눌러온 이야기다.
# 프롤로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
잡지사 기자 시절, 나는 ‘도시 괴담’을 주제로 한 기획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고 마감은 다가오는데 도무지 쓸 만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꾸며서라도 기사를 완성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조용히 내게 말씀하셨다.
“기사는 거짓말로 채우면 안 돼.
진짜 있었던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직접 발품을 팔아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수집하시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이야기는 우리 외할머니가 생전에 어머니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였다.
# 하늘이 내린 아이, 칠석
1950년대 후반, 전라남도 해남의 K마을.
여름 햇볕에 논두렁은 바삭하게 갈라지고, 바람은 짠 내음을 머금은 채 느릿하게 지나갔다.
그 마을에서 손꼽히는 지주였던 유 주사의 집은 늘 북적였다.
대청마루는 넓었고, 사랑방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일곱 명의 고운 딸들은 바느질과 글공부에 바빴고, 서울서 자란 한씨 부인은 언제나 단정히 한복을 차려입고 집안을 돌봤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딱 하나, 아들이 없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유 주사였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마음 한구석이 점점 조급해졌다.
“내 제사는 누가 챙겨주나…”
밤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내뱉는 남편의 한숨에, 한씨 부인의 가슴은 매번 저릿하게 내려앉았다.
믿지 않던 미신에도 조금씩 흔들리던 한씨 부인은 결국 발품을 팔아 무당을 찾아다녔다.
비 오듯 굿판에 뿌린 쌀과 동전들, 쑥 타는 냄새, 밤새 이어진 북소리와 염불.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늦은 나이에 가진 아이는 칠월칠석날에 태어났다.
“칠석날 얻은 아이라고 칠석이라 불러야지.”
유 주사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웃음으로 젖어 있었다.
그날 이후, 한씨 부인은 해마다 칠석날이면 멍석을 깔고 쌀 세 가마니를 부어
칠성님께 아들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작은 촛불을 켜고 두 손을 모은 채 속삭이듯 기도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마을의 여름 바람 속에 스며들었다.
# 칠석날, 하얀 구렁이가 나타나다
칠월칠석날은 원래 비가 내리는 게 상례였다.
어른들은 그 비를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 흘리는 눈물’이라 말했다.
하지만 칠석이가 열한 살을 맞던 해, 그날은 유난히 이상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햇빛은 숨을 막을 듯 쨍쨍 내리쬐었다.
집안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작은 생일상도 마련되었다.
한씨 부인은 흰 저고리와 옥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올렸다.
마당 앞 높이 쌓인 쌀더미 앞에서 촛불을 켜고 두 손을 모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우리 칠석이 수명장수하게 하옵시고,
큰 복을 내려 주소서…”
그때였다.
문득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촛불이 꺼졌다.
불씨를 찾으러 부엌으로 향하던 한씨 부인은, 마당으로 이어진 작은 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이 한순간 멎는 것 같은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쌀더미 위에 송아지만 하얀 구렁이가 몸을 감고 있었다.
토끼처럼 긴 귀, 주먹만 한 눈동자, 햇빛에 은빛으로 번쩍이는 비늘.
그 생물이 고개를 들어 한씨 부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또렷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아이고… 나, 죽네…”
그녀의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는 소리에,
부엌에서 일하던 식모와 사랑방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쌀더미 위, 또아리를 튼 구렁이가
번쩍이는 눈동자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당 전체가 정적에 잠겼다.
# 마당에 드리운 그림자
그 순간, 유 주사가 곡괭이를 움켜쥔 채 달려왔다.
숨이 거칠게 들썩였고 눈빛은 잔뜩 흩어져 있었다.
“요물이 남의 경사에 흉을 드리우려는 게로구나!”
외마디 고함과 함께 곡괭이가 허공을 가르며 내리꽂혔다.
철과 비늘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구렁이는 몸을 비틀며 괴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햇빛에 반짝이던 은빛 비늘이 흙먼지 속에서 힘없이 굴렀다.
마지막 한 번 몸을 크게 떨곤, 구렁이는 결국 움직임을 멈췄다.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신경통에 좋다더라…”
동네 사람들은 누군가 먼저 불을 지피자 하나둘 모여들었다.
마당에서는 곧 구렁이 고기를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동네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잠시 후, 학교에서 돌아온 칠석이가 마당을 지나쳤다.
아이의 시선이 쓸쓸히 쏟아졌다.
쌀더미 옆에 놓인 거대한 구렁이의 시체를 본 칠석이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고… 배야…”
처음엔 잠깐 배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선 순간, 유 주사와 한씨 부인은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칠석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안 가득 토해낸 선혈이 방바닥을 물들였고,
이미 생명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칠석아!”
한씨 부인은 눈이 뒤집혀 바닥에 쓰러졌고,
유 주사는 절규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마당을 메운 햇빛이
그 절망을 더욱 잔인하게 비추고 있었다.
# 승천을 기다리지 못한 자의 대가
칠석이를 잃고 난 지 몇 달, 유 주사 집은 온종일 적막에 잠겨 있었다.
한씨 부인의 몰골은 사람 같지 않았다. 마루 끝에 앉아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오후, 허름한 승복 차림의 한 스님이 대문을 두드렸다.
“보살님, 시주를 조금 하시겠소.”
한씨 부인은 멍한 얼굴로 시주를 내왔다.
스님은 문득 고개를 들어 지붕을 빤히 바라보았다.
“허허… 이 집에 큰 변고가 있었지요?”
놀란 한씨 부인이 칠석이의 일을 이야기를 하소연하자
스님은 한씨의 말을 잠자코 듣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허허… 제 이름 하나 얻겠다고
대대로 공을 닦아온 집안을 스스로 무너뜨리다니…
큰 비가 내려 하늘이 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때를 어기고 욕심을 부리니…
결국 용이 되지도, 이무기조차 되지도 못한 허망한 혼령이 되고 말았구나.”
스님은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며 한참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보살님, 참으로 큰 아들을 잃으셨습니다.
그 하얀 구렁이는 보통 짐승이 아니었소.
원래 용이 되기 위해 집터를 지키며 공덕을 쌓던 영물이었지요.
공덕을 다 채우면, 좋은 날을 골라 큰 비를 타고 하늘로 오릅니다.
허나 때를 채우지 못한 이무기는, 간혹 죽음을 무릅쓰고 인간 앞에 스스로 나타나지요.”
스님은 한 씨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 달린 하얀 구렁이라면 더더욱 귀한 영물이었소.
만약 그때 이렇게 말했더라면,
‘대명님, 승천하십시오.’
그리고 머리칼 한 줌을 잘라 태워 연기를 맡게 했더라면…
그 구렁이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고,
큰 비가 내린 날 하늘로 올랐을 것이오.
그리고 대대로 큰 복을 내려겠지요.”
스님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참았던 감정이 무너진 듯,
한씨 부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 한여름의 꿈, 원혼만 남은 빈터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는 작은 촛불처럼,
그 집안의 운명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뒤, 유 주사의 집착은 깊어졌다.
밤마다 술을 마셨고, 새로운 여자들을 들였다.
그러나 성정은 날카롭게 변해 있었고, 그럴수록 여인들은 도망쳤다.
남겨진 건 더 깊은 허기와 술뿐이었다.
밤이면 유 주사는 골목을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 같기도 했고, 흐느낌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다.
집안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결정적인 사건이 찾아왔다.
셋째 딸이 친정을 찾았다.
밤이 깊어, 그녀는 동생 칠석이가 쓰던 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다 한밤중, 숨 막히는 기운에 눈을 떴다.
그 순간, 흐릿한 등불 아래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제 아버지인 유 주사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방 안에는 목을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어둠은 순식간에 찢어졌다.
다음 날, 마을은 소문으로 뒤덮였다.
“구렁이 원혼이 씌인 게지…”
“이제 저 집은 끝났구먼…”
셋째 딸은 그날 이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이를 낳은 지 하루 만에,
입안 가득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물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날 이후, 유 주사의 식솔들은 자취를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던 대문 안은 이제 잡초만 무성한 빈터로 남았다.
여름 바람에 스치는 억새 소리만이
사라진 집안의 기억을 전하고 있었다.
# 에필로그: 전설,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
어머니는 나를 위해, 그리고 이 괴담 기획안을 위해
거의 두 권에 달하는 이야기를 모아주셨다.
밤마다 창호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속에서
잊힌 전설과 마을의 비밀,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가족의 역사를 풀어놓으셨다.
그 수많은 메모와 녹취, 기억의 파편들은
언젠가 세상에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원고가 다 완성되기도 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고,
나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건넨 이야기들은
시간을 견디며 여전히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다.
그 목소리들은 지금도 나를 부른다.
어쩌면,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또 다른 형태로 세상에 살아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여전히 원고를 다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