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박약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나를 바꾸는 심리학 수업
어느 늦은 밤, 하루의 소란이 가라앉고 침대 맡에 스탠드 불빛만이 남았을 때, 우리는 종종 설명할 수 없는 패배감에 휩싸이곤 합니다. 분명 이번만큼은 다르게 행동하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화가 나도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고, 불안하다고 해서 술을 마시거나 폭식을 하지 않겠다고, 더 이상 나를 갉아먹는 관계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수없이 스스로와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우리는 또다시 익숙한 폐허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은 후회를 하며, 똑같은 방식의 자책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이때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실수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라는 사람이 도무지 구제 불능처럼 느껴지는 무력감, 내가 내 삶의 통제권을 쥐고 있지 않다는 서늘한 공포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도대체 왜 나는 변하지 못하는가. 내 의지가 이토록 나약한 것인가. 아니면 내 성격 어딘가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인가.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당신의 의지나 성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반복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 즉 보이지 않는 나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믿지만, 사실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나의 뇌가 만들어낸 오래된 자동항법장치입니다.
우리의 뇌는 진실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위해 설계된 기관이 아닙니다.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뇌의 제1목표는 생존이며, 제2목표는 에너지 효율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뇌는 끊임없이 패턴을 만듭니다. 한번 안전하다고 판단된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그것이 비록 장기적으로는 나에게 해가 될지라도, 뇌의 깊은 곳 기저핵이라는 부위에 단단히 저장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압축 파일과 같습니다. 매번 새로운 상황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은 뇌에게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뇌는 자주 반복되는 상황을 만나면 의식적인 사고 과정인 전전두엽을 끄고, 무의식적인 반응 장치인 기저핵을 켜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습관의 정체입니다. 문제는 이 습관이 단순히 양치질을 하거나 운전을 하는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의 거절을 접했을 때 느끼는 자동적인 수치심, 갈등 상황에서 회피해버리는 방어 기제, 불안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켜는 행동 패턴, 심지어는 나 자신을 비하하는 내면의 목소리까지도 뇌의 입장에서는 그저 오랫동안 반복되어 효율화된 신경 회로의 작동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변하기 힘든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무의식적인 시스템을 이기려 합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우리의 뇌는 즉시 가장 효율적인 모드, 즉 옛날의 습관으로 복귀합니다. 이것은 댐이 무너져 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의 배선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뇌과학과 심리학, 그리고 행동경제학의 도구들을 빌려 우리 안의 자동반응 시스템을 해부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 생각, 행동 패턴을 투명하게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들의 노예가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것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선택권이 생깁니다. 이제, 그 스위치를 켜볼 시간입니다.
아침 알람 소리와 함께 우리는 눈을 뜹니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욕실로 향해 늘 쓰던 칫솔을 집어 듭니다. 출근길 버스에 몸을 싣고 회사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기까지, 과연 우리는 몇 번이나 의식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 행동의 40퍼센트에서 많게는 95퍼센트가 무의식적인 습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우리는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자동항법 모드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뇌의 생물학적 구조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는 패턴을 반복하는 존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왜 우리의 뇌는 이토록 삶을 자동화하려고 애쓰는 것일까요?
그 답은 생존과 에너지 효율성에 있습니다. 뇌는 몸무게의 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전체 에너지의 20퍼센트 이상을 사용하는 에너지 과소비 기관입니다. 원시 시대에 에너지는 곧 생명이었기에, 뇌는 생존을 위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낯선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은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래서 뇌는 반복되는 상황을 만나면 즉시 사고 회로를 차단하고, 과거의 기억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익숙한 행동 패턴을 꺼내 듭니다. 이것이 습관의 기원입니다.
이 자동화 시스템을 지휘하는 곳은 뇌의 깊숙한 곳에 있는 기저핵입니다. 우리가 처음 운전을 배울 때는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을 풀가동하느라 진땀을 뺍니다. 하지만 운전이 익숙해지면 이 기능은 기저핵으로 이관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딴생각을 하거나 옆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집까지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저핵은 복잡한 행동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자동 처리해버립니다.
문제는 기저핵이 선악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기저핵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익숙한가입니다. 퇴근 후 운동을 하는 습관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폭식을 하는 습관이나 기저핵 입장에서는 똑같이 효율적인 자동 반응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쁜 습관을 끊기 어려운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가 그것을 가장 효율적인 생존 전략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감정을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화가 나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불안하면 미래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뇌과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감정은 사실(Fact)이 아니라, 뇌가 상황을 해석하여 만들어낸 반응(Reaction)에 불과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감정의 구성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뇌는 외부에서 들어온 감각 정보와 내 몸의 신체 신호를 결합하여 끊임없이 예측을 내놓습니다. 예를 들어,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는 신체 반응이 있을 때, 뇌가 지금은 면접장 앞이다라는 맥락과 결합하면 이를 불안이라고 해석합니다. 반면 똑같은 신체 반응이라도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 앞이다라는 맥락과 결합하면 이를 설렘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감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뇌가 그 순간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붙인 이름표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뇌의 해석이 항상 정확하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특히 과거에 상처받은 기억이나 부정적인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뇌의 해석 시스템은 편향되어 있습니다. 마치 고장 난 화재 경보기와 같습니다. 연기가 나지 않았는데도 요리하는 냄새만 맡고도 불이 났다고 요란하게 경보를 울려대는 것입니다. 상사의 무표정을 보고 나를 싫어한다라고 해석하거나, 연인의 작은 말실수를 보고 나를 떠날 것이다라고 과잉 해석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감정을 신호등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빨간불이 켜졌다고 해서 도로가 끊긴 것은 아닙니다. 단지 멈추라는 신호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안이나 분노라는 감정이 솟구칠 때, 그것을 상황 자체가 위험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 뇌가 지금 무언가를 위험하다고 감지했구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느낌은 리얼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실은 아닙니다. 이 거리를 확보할 때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작심삼일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입니다. 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까요? 1장에서 기저핵의 효율성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뇌의 항상성(Homeostasis)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 몸이 체온을 36.5도로 유지하려 하듯, 뇌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 패턴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신경회로의 관성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살아온 사람의 뇌는 그 부정적인 상태를 안전지대(Comfort Zone)로 인식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행복하고 평온한 상태가 찾아오면, 뇌는 이를 낯설고 위험한 상태로 감지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다시 걱정거리를 찾아내거나, 일을 그르쳐서라도 익숙한 우울함으로 복귀하려 합니다. 뇌의 입장에서는 익숙한 고통이 낯선 행복보다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를 시도할 때 느끼는 저항감, 즉 귀찮음이나 두려움은 뇌가 보내는 복귀 신호입니다. 원래대로 해, 튀지 마,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사실 내 생각이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신경회로의 마찰음입니다. 이 저항감을 내 의지의 부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아, 내가 지금 변화하고 있구나, 뇌가 저항하는 걸 보니 내가 기존의 패턴을 벗어나고 있구나라고 역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관성은 멈추는 데도 에너지가 들지만, 일단 방향을 틀고 나면 그쪽으로 계속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선택과 자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물은 자극이 오면 즉시 반응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위협받으면 공격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극을 받고 반응하기 직전에 아주 찰나의 순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동반응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기술은 바로 이 0.5초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순간, 바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심호흡을 한 번 하는 것. 불안해서 손톱을 물어뜯고 싶을 때, 잠시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 이 짧은 물리적 멈춤이 폭주하던 기저핵의 회로를 차단하고, 잠들어 있던 전전두엽을 깨웁니다.
이 0.5초 동안 우리는 위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행동이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 하나가 자동항법장치를 끄고 수동 조작 모드로 전환하는 스위치입니다. 처음에는 이 공간을 발견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감정이 이미 지나가버린 뒤에야 아차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습하면 이 공간은 점점 넓어집니다. 0.5초가 1초가 되고, 1초가 5초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본능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됩니다.
양자역학에는 관찰자 효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관찰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대상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입니다. 심리학에서도 이는 유효합니다. 내가 나의 감정과 생각을 관찰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화가 났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나와 화를 동일시하는 표현입니다. 이 문장을 나는 내 안에 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라고 바꿔보십시오. 이를 심리학에서는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라고 합니다. 영화관 스크린에 불이 났다고 해서 관객이 화상을 입지 않듯이, 내 마음의 스크린에 분노나 불안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음을 인식하면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을 3인칭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역설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문제보다 타인의 문제에 대해 더 현명한 조언을 해줍니다.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아니라 내 친구가 이런 상황이라면 뭐라고 말해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를 타인처럼 객관화하는 이 관찰자의 시선이야말로 자기 인식의 핵심 도구입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종종 멍하니 있다가 과거의 이불 킥 할 기억을 떠올리고 괴로워하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재난을 상상하며 불안해합니다. 이를 뇌과학에서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의 활성화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잡념의 공회전입니다.
이 공회전을 멈추는 기술이 바로 메타인지(Metacognition), 즉 생각에 대한 생각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생각 속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빠져나와 생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메타인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명상은 종교적인 수행이 아니라 이 메타인지 근육을 키우는 뇌 훈련입니다. 호흡에 집중하다가 딴생각이 들었을 때, 아, 내가 딴생각을 했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과정. 이 알아차림과 돌아옴의 반복이 전전두엽의 통제력을 강화합니다. 잡념을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잡념에 빠진 나를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메타인지가 발달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갖게 됩니다.
자동반응을 멈추고 관찰하는 힘을 길렀다면, 이제는 행동을 바꿀 차례입니다. 신경회로를 재배선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패턴 인터럽트(Pattern Interrupt), 즉 기존의 패턴을 의도적으로 끊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울할 때 방 안에 틀어박혀 어두운 음악을 듣는 것이 기존의 패턴이었다면, 우울한 기분이 들자마자 벌떡 일어나 신나는 댄스 음악을 틀고 몸을 흔들어보는 것입니다. 무기력함이 찾아오면 찬물로 세수를 하거나 밖으로 뛰쳐나가 전력 질주를 해봅니다. 뇌는 맥락에 맞지 않는 이 낯선 행동에 당황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우울 회로를 잠시 멈추고 상황을 재설정하려 합니다.
이것은 뇌에게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정입니다. 우울하다고 해서 반드시 축 처져야 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새로운 경험치가 쌓이면, 뇌는 서서히 우울=무기력이라는 등식을 깨기 시작합니다. 익숙한 불행으로 흘러가려는 물길을 낯선 행복 쪽으로 억지로라도 돌리는 것, 이것이 패턴 끊기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겠지만, 낯선 행복도 반복하면 익숙한 행복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강한 멘탈을 상처받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강함은 단단함이 아니라 유연함에 있습니다. 단단한 것은 부러지기 쉽지만, 유연한 것은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습니다.
심리적 유연성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나 원치 않는 감정을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수용(Acceptance)은 포기가 아닙니다.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는 것에 화를 내거나 비를 멈추려고 애쓰는 대신, 우산을 쓰거나 빗소리를 즐기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불안이나 우울을 적으로 간주하고 없애려고 싸우면 싸울수록, 그 감정은 더 커집니다. 뇌과학적으로 저항은 해당 회로를 더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래, 지금 불안하구나. 그럴 수 있어라고 쿨하게 인정해주십시오. 감정을 손님처럼 대접하고 흘려보낼 때, 우리는 감정 소모 없이 눈앞의 가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쓸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결국 강한 것을 이깁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삶을 설계해야 합니다. 의지력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대신 우리는 환경을 믿어야 합니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넛지(Nudge) 혹은 선택 설계라고 합니다.
나쁜 습관을 유발하는 신호는 감추고, 좋은 행동을 유발하는 신호는 드러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덜 보고 싶다면 충전기를 침실 밖으로 치우십시오. 책을 읽고 싶다면 리모컨을 서랍에 넣고 책을 베개 위에 올려두십시오. 뇌가 고민 없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세팅하는 것이 의지력을 쥐어짜는 것보다 백 배 효과적입니다.
또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 의식적인 루틴을 만드십시오. 아침에 눈뜨자마자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오늘 하루 어떤 마음으로 살 것인가 의도를 세우는 1분. 잠들기 전 오늘 하루 감사했던 일 3가지를 적는 1분. 이 사소한 의식들이 무의식의 흐름에 말뚝을 박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끄는 키(Key)가 됩니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초대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을 멋대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이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나, 즉 뇌와 심리의 자동화된 시스템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는 게으르거나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효율성을 추구하는 뇌의 본능과 왜곡된 심리적 패턴에 갇혀 있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나를 보는 힘은 마법처럼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지우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화가 날 것이고, 여전히 불안할 것이며, 때로는 다시 예전의 나쁜 습관으로 돌아가 자책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그 상태가 전부인 줄 알고 매몰되었다면, 이제는 아, 내 기저핵이 또 작동했구나, 내 뇌가 지금 두려워하는구나라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알아차림이 전부입니다. 안다는 것은 빛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 속의 괴물은 불을 켜면 그저 낡은 옷걸이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강박도 직시하는 순간 힘을 잃습니다.
당신은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수리할 필요가 있는 기계가 아니라, 이해받고 관찰되어야 할 복잡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이제 자동항법장치를 끄고, 당신의 두 손으로 삶의 핸들을 잡으십시오. 때로는 떨리고 서툴지라도, 그 길이야말로 진짜 당신의 삶입니다. 보이지 않던 나를 보게 된 당신의 앞날에, 이제는 당신이 선택한 진정한 자유가 깃들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