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는 불운마저 행운이 된다. 아니, 어쩌면 불운이야말로 여행을 여행답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행은 그만큼 기억에도 옅게 남기 때문이다.
도쿄 여행을 하던 날이었다. 나는 슬램덩크를 본 적도 없으면서, 슬램덩크의 배경이 되었다는 가마쿠라에 꼭 가보고 싶었다. 당시 우리는 도쿄 근교의 하코네에 있었고, 제대로 된 교통패스를 끊었다면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하지만 교통 담당이었던 남편이 패스를 잘못 끊는 바람에, 무려 다섯 시간이 걸려 가마쿠라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마쿠라에서 보내기로 한 일정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늦어진 도착 시간만큼 계획은 줄줄이 엉켰고, 나는 점점 화가 치밀었다. 여행에서의 시간은 유난히 소중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감정은 더 예민해졌다.
화가 난 채로 거리를 씩씩거리며 걷고 있었을 때, 남편은 조심스레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왔다. 내가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다 문득—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핑크빛 노을, 바로 앞에서 부서지는 바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 세 박자가 놀랍도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정말 일본 애니메이션 속 장면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게다가 손에 쥔 차가운 가마쿠라 맥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그날 나는 배웠다. 여행에서는 불운이 너무 쉽게 행복으로 변한다는 것을. 예측 불가능함이 오히려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가마쿠라는 내게 오래도록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날의 공기, 습도, 냄새, 색감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결국 인생도 여행과 다르지 않다. 예측하지 못할 순간들이 우리 앞에 계속 나타날 테지만, 그 우연을 단단한 행복으로 바꿔줄 나만의 작은 맥주 한 모금 같은 쉼만 있다면— 그 또한 충분히 사랑스러운 여정이 될지 모른다.